휴대용 발전기·버너 사재기 붐, 유럽 에너지 위기 현실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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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호 25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왼쪽)이 프란스 팀머만스 유럽 그린딜 부의장(오른쪽)과 함께 지난 7월 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회원국들이 내년 봄까지 가스 사용을 15% 줄이는 목표 설정 방안 등을 담은 가스 수요 감축 계획을 제안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왼쪽)이 프란스 팀머만스 유럽 그린딜 부의장(오른쪽)과 함께 지난 7월 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회원국들이 내년 봄까지 가스 사용을 15% 줄이는 목표 설정 방안 등을 담은 가스 수요 감축 계획을 제안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길에서 동네 이웃인 P를 만났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가 물었다. “겨울 대비책 좀 세워 놨어요?” 올겨울 예기치 않은 정전이 발생하거나 집 난방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하고 있냐는 얘기다. “초와 성냥은 좀 사 놨어요. 근데 일시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설마 오랫동안 에너지 공급이 끊기기야 하겠어요?” P가 얕은 한숨을 쉬더니 말한다. “위험을 과소평가하고 있네요. 보기보다 더 심각하다고요. 우리는 휴대용 가스버너를 샀어요. 가스도 대량으로 사서 창고에 쟁여 놨고요. 독일에서 주문하면 스위스보다 가격이 저렴해요. 혹시나 해서 불로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좀 준비해 놨어요.”

별일 있겠나 싶었는데 P의 말을 듣고 있으니 유럽 에너지 위기가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다. 그는 재생에너지기업에서 일하는 데이터 과학자다. 근거 없이 부풀려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초와 성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날 저녁 바로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족 수대로 캠핑용 침낭을 구입했다. 영하 15도에서도 따뜻하게 잘 수 있다니 난방이 중단되면 침낭을 쓰면 될 것이다. 휴대용 가스버너도 구입한 후 P에게 “조언해 줘서 고맙다. 우리도 이제 좀 대비가 된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이미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 “우리 집은 여차하면 올겨울을 태국에서 보낼까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서 어렵게 버티느니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미리 비행기표 사 두려고요.” 취사도, 난방도 안 되는 위기에 과연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유난을 떤다고 P를 비난할 수는 없다. 최근 몇 주 스위스 언론은 에너지 위기를 경고하는 기사로 넘치고 있다. 스위스 최대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휴대용 발전기 판매가 1년 전보다 9배 늘었다고 한다.

최악 상황 땐 취리히 하루 12시간 단전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왼쪽)와 키릴 페트코프 불가리아 총리가 지난 7월 8일 양국을 연결하는 가스 파이프라인 개통식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왼쪽)와 키릴 페트코프 불가리아 총리가 지난 7월 8일 양국을 연결하는 가스 파이프라인 개통식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 사태 뒤에는 러시아가 있다. 가스는 스위스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약 15% 정도를 차지하는데, 그중 절반이 러시아산이다. 스위스에서는 가스가 전혀 생산되지 않고 대량 비축 공간도 없기 때문에 필요한 가스를 바로바로 수입해 써야 한다. 스위스에서 가스는 대개 난방과 취사 목적으로 쓰인다.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가스 난방을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는 자국 제재에 동참한 유럽 국가들에 맞서 가스 공급을 무기화했다. 러시아가 원하면 언제든 ‘밸브를 잠글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실상 협박을 하고 있다. 가격 상승(지난 8월 기준 스위스 가스비는 전쟁 초기인 지난 2월보다 15% 상승했고 2020년 12월보다는 55% 상승했다)도 문제지만, 한겨울에 난방용 가스가 끊기는 건 생존과 연관된 위험이다. 또한 가스는 전기 생산에 쓰이기 때문에 주변국에서 전기를 수입하는 스위스는 연쇄적 전기 부족도 우려하고 있다.

스위스 정부의 에너지 절약 캠페인. 실내 온도 유지를 위해 창문을 자주 열지 말라는 뜻이다. [사진 스위스에너지청]

스위스 정부의 에너지 절약 캠페인. 실내 온도 유지를 위해 창문을 자주 열지 말라는 뜻이다. [사진 스위스에너지청]

스위스 연방정부와 개별 칸톤(주)들은 별도로 대책을 준비 중이다. 칸톤 취리히의 경우 불확실한 상황 전개에 따라 세 가지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첫째, ‘좋음(Gut)’은 올겨울이 비교적 따뜻하고 다른 나라에서 계속 전기를 수입할 수 있으며 러시아산 가스 공급에도 제한이 거의 없는 경우를 가정한다. 이때는 시민들에게 자발적 에너지 절약만 권고한다는 계획이다. 둘째, ‘중간(Mittel)’은 겨울이 춥고 전기와 가스 수입이 전보다 줄어드는 경우로 권고 이상의 조치가 행해진다. 실내 수영장 개방 시간 단축, 긴급 발전기를 이용한 전력 보충 등이다. 셋째, ‘나쁨(Schlecht)’은 겨울이 춥고 전기와 가스 수입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데다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란 예를 들어 스위스 핵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이때는 에너지 쿼터제를 시행한다. 필수적 사용처 외에는 전기 소비를 제한한다는 거다. 빨래건조기나 전기차 사용이 제한 대상이다. 전기차는 칸톤 정부가 지정한 ‘필수적 이동’, 즉 출퇴근이나 병원 방문, 법원 출석, 장보기, 또는 종교 행사 참석 등에만 사용할 수 있다. 교회에 갈 때는 전기차를 쓸 수 있지만 극장에 갈 때는 못 쓴다는 얘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칸톤 취리히 정부는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나쁨’보다 악화되는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때는 ‘시크릿 플랜’이 가동된다. 이 플랜에는 두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칸톤 취리히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하루 4시간, 다른 쪽에는 하루 12시간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 형평성을 위해 다음날에는 단전 시간을 서로 바꾼다. 두 번째는 칸톤 취리히를 3등분한 다음 돌아가면서 하루 8시간씩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 취리히전력발전소(EKZ) 다니엘 부허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이 플랜은 금고에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어지간하면 꺼내 쓸 일이 없겠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올겨울 최악의 경우 취리히에서 하루 12시간의 단전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의 포스터.‘녹색의 꿈을 중단하고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 스위스에너지청]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의 포스터.‘녹색의 꿈을 중단하고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 스위스에너지청]

현재로선 에너지 공급을 조절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 보인다. 바꿀 수 있는 건 수요다. 스위스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에너지 위기 대응 방식은 수요를 줄이는 것에 맞춰져 있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지난 8월 31일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시작했다. ‘에너지가 부족하다, 낭비하지 말자’라는 단순명료한 슬로건 하에 정부가 제시하는 몇 가지 절약 방안을 보자. 가정 난방 최대 온도를 섭씨 19도로 설정하기, 수영장 가스 난방 금지, 창문 오래 열지 않기, 요리할 때 냄비 뚜껑 닫기, 설거지나 샤워할 때 안 쓰는 온수 잠그기 등이다. 물론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방안의 설정 온도를 1도 낮출 때마다 가스 소비량을 6% 줄일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 얼마나 동참할 것인지, 위기가 장기화되어도 이 방식이 통할 것인지 의문이다.

사람들은 불안한 상황에 혼란을 느낀다. 그 혼란을 반영하는 사건이 있었다. 스위스 타블로이드 일간지 블릭(Blick)이 지난 9월 6일에 ‘난방 범죄자는 감옥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부제목은 ‘에너지 범죄자는 벌벌 떨 것이다. 가스 법규를 위반하면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해진다’였다. 내용을 보면 최대 19도로 정해진 난방 기준을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최대 3000스위스프랑(약 440만원)까지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완전히 틀린 기사는 아니다. 실제 정부가 대응책의 일환으로 이 같은 법규를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아주 나빠질 경우’라는 전제를 빠뜨려 오해를 불렀다. 현재 적용 중인 규정도 아닌데 외신들이 이를 인용해 기사를 재생산하면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경찰이 불시에 방문해 19도인지 확인하느냐’ ‘스위스에서는 방이 20도가 되면 감옥에 가는 거냐’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19도 난방 어기면 신고” 가짜뉴스도

이 논란은 가짜뉴스로 이어졌다. 블릭의 보도 후 트위터에 캠페인 포스터 한 장이 돌기 시작했다. 이 포스터에는 전화를 거는 여성의 모습과 함께 이렇게 쓰여 있다. ‘이웃이 19도 이상으로 집을 난방합니까? 우리에게 알려주세요.’ 그 밑에는 스위스연방 에너지부의 실제 공식 연락처가 안내되어 있고 ‘익명 보장’ ‘사례금 200스위스프랑(약 29만원)’이라는 조건도 붙어 있다. 마치 스위스 정부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웃을 감시해 신고하라고 독려하는 듯하다. 이 사진은 트위터에서 수천 회 리트윗되고 일부 외신에도 보도됐다. 그러나 이는 조작된 사진이다. 정부는 이런 포스터를 제작한 적이 없다고 밝힌 뒤 현재 사건을 조사 중이다.

에너지 위기는 캠핑 침낭 속에서 며칠 자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위의 가짜뉴스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여론은 이미 요동치고 있다. 한 언론사 토론 섹션에서는 ‘중립국 스위스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대가로 평범한 시민이 고통받는다. 지금이라도 푸틴과 협상하라’는 글이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이민자 혐오로 유명한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은 좌파와 녹색당이 ‘에너지 봉쇄’를 하려 한다며 속지 말라고 주장한다. 탄소 배출 때문에 사용을 줄여 왔던 석유가 다시 전기와 가스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다. 유럽은 올겨울을 잘 넘길 수 있을까.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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