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문예춘추 구술자료 「독백록」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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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히로히토 일왕 “전쟁 면책주장”파문/형식적 어전회의 반전 주장 펼 수 조차 없어/패전 이유는 정신에 치중 과학 얕봤기 때문
아시아대륙에 3천만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왕 히로히토(유인)가 개전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면책을 주장하는 「독백록」이 최근 일본에서 발견돼 화제를 낳고 있다.
아키히토(명인) 새 국왕의 즉위식 준비에 부산한 일본은 최근 월간지 『문예춘추』(12월호)가 히로히토 독백록을 발굴,공개한데 대해 「초일급사료」발견이라고 흥분하고 있지만 그 내용중 전쟁 면책론 때문에 주변국 비판의 소지가 커지고 있다.
문제의 독백록은 히로히토가 종전 직후인 46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총 8시간동안 측근들과 만난 자리에서 구술한 것을 미 맥아더 사령부와의 사이에서 통역일을 맡기도 한 시종 데라자키(사치영성어)가 기록한 것이다.
히로히토는 그의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중국 만주의 장작림 폭사사건(28년)에서부터 만주사변(31년) 일 청년 육군장교 군사쿠데타였던 2ㆍ26사건(36년) 태평양전쟁 개전(41년) 포츠담선언 수락(45년) 등의 경위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내용이다.
일본 매스컴들은 이 자료가 태평양 전쟁후 굳게 입을 다물어 그 의중을 헤아리기 힘들었던 히로히토 일왕이 비교적 솔직하게 전쟁등에 관한 당시 자신의 고뇌를 토로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번의 사료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독백록에서 그는 자신의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자기변호로 시종했다. 정ㆍ군을 통솔한 최고통수권자로 작전으로부터 사소한 인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국정에 관여했다고 이전에 때때로 시인했던 사실과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감행,미일 개전에 들어간 경위에 대해 『그때 내가 만약 주전론을 억눌렀다면 정예군을 갖고 있으면서 미국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어 국내 여론이 비등,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라며 대미 전쟁결정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독백록속에서 「고백」했다.
한편 중요정책이 결정되는 어전회의모습에 대해서도 『소위 어전회의라는 것은 이상하다. 추밀원의장을 제외한 출석자는 전원 의견일치이므로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회의가 형식적이므로 천황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고 변명하듯 털어놓았다.
그러나 오키나와 패전에 관해 『나는 육해군작전의 불일치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오키나와는 3개사단은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곳』이라고 분석하는가 하면 태평양전쟁에 패전한 원인으로 『첫째 병법 연구의 불충분,둘째 정신에 치중,과학의 힘을 경시했다』는 등 병법가 면모를 과시했다.
개전면책 주장에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책임자인 히로히토 일왕은 솔직한 참회록 대신 변명록을 남겼다는 비판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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