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강간법' 27년 만에 폐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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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파키스탄 여성들이 15일 강간법을 개정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파키스탄 의회는 4명의 남자 증인을 내세우지 않으면 강간 피해자를 오히려 간통으로 모는 기존 법을 개정했다. [이슬라마바드 AP=연합뉴스]

파키스탄 하원은 15일 이슬람 전통을 바탕으로 여성을 불공평하게 대했던 '강간법'을 획기적으로 개정한 '여성보호법'을 가결했다. 27년간 성범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던 파키스탄 여성과 인권단체가 일궈낸 값진 승리다.

1979년 이슬람주의 지아울 하크 군사정부가 제정한 '강간법'이 사실상 폐지되는 것이다. 과거 이 법에 따르면 강간 피해 여성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4명의 남자 증인을 내세워야했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상 이렇게 증인을 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해 여성이 오히려 간통을 저지른 것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 상원을 통과하고 대통령이 최종 승인하면 발효될 여성보호법에 따르면 파키스탄 여성은 성범죄 사건과 관련해 이슬람 법정에 갈 필요가 없게 된다.

앞으로는 고소인이 원할 경우 민간 법정이 형법을 적용해 강간 사건을 다루게 된다. 대신 간통범에 대해 사형과 태형을 선고할 수 있던 기존의 '강간법'과는 달리 개정법은 최고 5년 징역형과 1만 루피(약 15만원)의 벌금형만 선고할 수 있도록 처벌 수위를 크게 낮췄다. 또 경찰이 간통 피의자를 구금하기 전에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도록 규정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날 법안이 통과된 직후 방송으로 생중계된 대국민 연설에서 "여성보호를 위해 부당한 강간법을 개정키로 단호하게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여성보호법'을 조속히 통과시키라고 상원에 촉구했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의 강경 이슬람 이미지를 쇄신하고 국제 인권단체의 비난을 막기 위해 강간법 개정을 적극 추진해왔다.

2004년에 시작된 강간법 개정 작업은 그동안 야권의 반발로 세 차례나 무산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원까지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전망하고 있다.

일부에선 여전히 새 법에 반발하고 있다. 15일 하원 표결에서 야당인 이슬람운동 소속 의원들이 모두 의사당을 퇴장했다. 파키스탄 이슬람 야권의 대표주자인 마울라나 파즐루르 라흐만은 "새 법안은 '프리 섹스'를 조장할 것"이라며 "코란과 샤리아법의 근간을 흔든 새 법의 적용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인 항의시위를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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