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하인스 워드 사이즈 ? 척 보고 딱 맞췄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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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태우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 리펑 전 중국 총리, 풋볼스타 하인스 워드…. 언뜻 무관해보이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서울 이태원에 있는 작은 양복점의 단골 고객이라는 것이다. 이달 초 한국-아프리카 포럼 참석차 내한했던 존 아제쿰 쿠푸어 가나 대통령도 도착하자마자 양복부터 주문했다.

이태원 네거리에서 15평 남짓한 '선'양복점을 경영하고 있는 이생로(55.사진) 사장의 단골은 이처럼 내로라 하는 세계적인 VIP들이 단골이다. 이 사장을 만나본 사람은 8개 국어가 가능한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세련된 매너, 그가 대학교수라는 사실에도 놀란다. 이 사장은 호원대 관광레저학부 겸임교수로 매주 4시간씩 호텔영어를 가르친다. 그는 1993년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 석사 학위를 땄다.

충북 음성 출신인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가난 때문에 가출했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성조지'를 배달하며 고학했다. 미 8군에 있는 LA메트로폴리탄대(2년제)를 나온 그는 75년부터 조선호텔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이 시절 맞춤양복을 선호하는 외국인 명사들을 상대하는 양복점을 하면 장사가 되겠다고 생각해오다 80년 창업했다.

"영어가 되고 호텔 양복점 이상의 완벽한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웠죠. 최고의 재단사를 고용하고 호텔 근무 시절 다진 인맥을 활용해 주한외교관들과 대기업 CEO들을 집중 공략했어요."

그의 양복은 한 벌에 40만~200만원으로 품질에 비해 싼편이라고 한다. 게다가 한번 만든 옷은 무한정 애프터 서비스해 준다. 이같은 소문이 번지면서 그의 가게에는 외국인 VIP들이 줄을 서게 됐다. 현재 주한 외교사절 가운데 30여명이 그의 고정 고객이다. 재단사 10명을 두고 매월 60벌 정도를 만든다.

"수십년 동안 세계 정상급 인사들에게 검증받았으니까 품질, 가격, 서비스 측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에피소드도 '정상급'이다. 바쁜 정치인 등을 상대하다 보니 치수를 잴 수 없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하룻 만에 옷을 만들어 납품한다. 1991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다. 그의 일정이 워낙 빠듯해 이 사장은 밤늦게 호텔로 들어서는 그를 먼발치에서 살펴보고 밤새워 옷을 만들어 다음날 오후 납품했다. 푸틴 대통령은 옷을 입어 보고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국회연설 등 나머지 일정을 이 사장이 만들어준 양복을 입고 소화했다. 이 사장은 "푸틴은 무뚝뚝했지만 철갑상어알과 고급 보드카를 선물해 주는 자상함도 보였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양복을 맞춰 줬다고 한다.

하인스 워드도 평소 TV로 살펴봤던 눈짐작 만으로 그의 신체 사이즈를 정확히 맞춰 놀라게 했다. 타계한 레이건 대통령의 경우 85년 방한 때 그에게 옷을 맞춰 입고 돌아간 뒤 옷을 입은 사진과 함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18년 고객인 사마란치 전 위원장은 몇년 전 부인상 때 상복까지 주문할 정도였다.

이 사장의 꿈은 이태원에 명사들이 원스톱으로 최고급 의류를 맞출 수 있는 맞춤 전문 백화점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솜씨와 서비스 정신 만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계산에서다.

"민간 외교사절이라는 생각으로 외국인 고객들을 대하고 있어요. 세계 모든 국가 정상의 양복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이가 더 들면 현재 호텔서 근무 중인 아들(28)에게 양복점을 물려줄 생각입니다."

글=이재훈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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