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통일열기 “두 얼굴”/안희창기자가 본 평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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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누구나 대화해도 「통일」로 끝나/구체방법ㆍ전망없어 “단순구호” 느낌
북한에서는 모든 길이 「통일」로 통한다.
「통일」이라는 말은 어떤 모임이나 행사에서도 빠지는 법이 없다.
어린이부터 노인,그리고 일반시민에서부터 고위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통일」이라는 개념은 「생의 나침반」이 되어 있는 듯했다.
말을 할 때도 통일,노래를 할 때도 통일,춤을 출 때도 통일,글을 쓸 때도 통일이었다.
심지어 결혼까지도 통일을 위해 미루어 놓은 사람도 있다.
대표단 숙소에서 접대원으로 일하는 유은주 양(23)이 그런 경우다.
『결혼할 나이가 된 것 같은데 언제 할 생각인가요.』
『통일 후에나 하겠지요.』
『그러자면 5년이나 1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늦지 않습니까.』
『일 없습네다(괜찮습니다). 그때가서 남조선 총각과 하고 싶습네다.』
가벼운 농담으로 건네본 결혼이야기도 「통일」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18일 우리측 기자들은 기사송고 대문에 예정된 점심시간을 2시간이나 넘겨 식당에 갔다. 늦게된 사정을 설명하며 식사를 요청했다.
식사를 나르는 접대원들과의 표정이 밝지 않아 기자들은 다시 한번 『너무 늦게와 수고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한 여성 접대원이 『늦은 것은 일없습네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고위급회담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라 처음에는 열심히 봉사하려 했디요.
그러나 어제 떼레비죤을 보니까 통일을 하려는 사람들 같디가 않아요.』
남측 대표가 「신통치 않은」 제안을 했기 때문에 북쪽 접대원들이 기분 나빠했던 사연을 우리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16일 평양교예(서커스)극장에서 만난 한 관리원에게 『교예가 매우 훌륭하니 서울에가 공연해도 큰 성황을 이룰 것』이라고 칭찬하자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콘크리트장벽이 있는데 어떻게 내려갈 수 있겠느냐』며 『통일만 되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결혼도 통일 뒤에나
『하나된 조국에서 남조선 학생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또랑또랑하게 말하던 12세 가량의 여학생에게 『언제부터 통일에 대해 생각했느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입니다』라는 답변이 나오는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년궁전의 각종 시설관람에 이어 펼쳐진 공연에서도 통일 열기는 이어졌다.
특히 인공기를 그린 T셔츠를 입은 5세 가량의 꼬마가 축구에서 벌어지는 각종 경기장면을 묘사한 춤을 경쾌한 음악반주에 맞추어 깜찍하게 춘 후 「조국통일」을 외치며 퇴장하자 장내는 환호에 휩싸였다.
이러한 통일열기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림수경 열풍」은 그 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림수경」은 딸로,언니로,동생으로 모든 북한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개성으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만난 50세 후반의 남자 안내원은 『여보 기자양반. 나한테 대학에 다니는 스물 두살 먹은 딸이 있는데,이 아이가 수경이 생각에 매일 울다가 공부를 못해 낙제를 했단 말이요. 글쎄 내참….』
옆에 있던 여성 열차원 오광숙 양(26)은 『북에서는 임양을 「통일의 꽃」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녀에게 『임양은 남한 사람인데 통일열기로 가득찬 북한에는 왜 임양같은 「통일의 꽃」이 없느냐』고 묻자 남자 안내원이 나서 『우리는 인민 모두가 통일의 꽃』이라고 답변했다.
통일에 대한 대화는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북에서는 95년을 통일의 해로 정했다는데 왜 그런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은 『수령님이 그렇게 교시하셨다』고 했다.
한 안내원은 『통일문제를 40년 이상 끌어온데다 수령님 연세가 많아지고 있으니 빨리 통일해 수령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95년까지는 통일이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배경설명까지 해주었다.
통일방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김 주석이 고려연방제로 해야 한다고 교시했기 때문에 모두다 고려연방제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통일문제에 관해 교시된 내용은 북한 주민들에게 「신성불가침」식의 「성역」이어서 토론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왜 고려연방제가 아니면 안되느냐』 혹은 『45년 이상 해결 안됐던 문제가 어떻게 일정기간내,그것도 5년 이내에 결판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북에서는 반통일 분자로 몰린다.
고려연방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토론에 들어가면 북한 사람들은 격해지거나 말을 돌리기 일쑤였다.
○림수경 얘기 열올려
『두 개의 지역정부가 공존한다는 고려연방제 논리는 노동당규약에 있는 「모든 사회의 공산주의화」와 모순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대부분 『지금 그런 문제를 논의하면 시간만 가니까 우선 연방제로 하는 게 급선무』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고려연방제나 김 주석의 통일 5대방침 등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남쪽 기자가 갑자기 물어보니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거리를 두덮는 엄청난 통일열기에 비하면 왠지 어색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한마디로 통일에 대한 국민적 납득도 없이 단순구호로서 외쳐만 대고 있다는 인상이다.
국제정세의 변화와 사회주의 고수에서 오는 갈등이 터져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억지로 막아보려고 하는 것이 현재 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통일열기의 본질이라는 결론 밖에 얻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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