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유니폼이 있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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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 혹은 「모기천국, 거지천국, 고양이천국」이라는 필리핀에 아시아 작가·예술가들의 캠프모임 참가를 위해 거주한지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제 나라를 떠나봐야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닌 듯 싶다. 서울을 떠나면서 내가 가졌던 심정적 변화는 지금까지 지겹도록 애착을 가지며 살았던 모든 것에 대해 비로소 「이유기」를 가짐으로써 좀더 성숙한 정서를 체험해 보리라 다짐한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마닐라공항에 내리자마자 응석받이처럼 서울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서툰 객지생활에서 차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닐라에는 놀라운 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한국인」이 많다는 점이요, 둘째는 백화점에 버젓이 「하녀유니폼」이 진열되고 그것을 사서 사용하는 것이며, 셋째는 서울에서 대학에 떨어져 이곳으로 유학(?)온 낙방 생까지 「하녀를 부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물가가 싸다는 이유로, 또는 필리핀 서민보다 생활여유가 좀 있다는 이유로 갑자기 국적불명의 귀족생활을 즐기는 몇몇 한국의 젊은이들을 눈여겨보면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대학 낙방 생들이 물밀듯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결정적 이유는 「영어 콤플렉스」에서 좀 벗어나 보자는 것이라 한다. 돈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에서 하녀를 당연한 듯이 부리고 그 하녀에게서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에게 무엇이 남는 것일까. 또 그런 공부는 어디에서 어떻게 쓰여질까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아시아인들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과 수모는 한국인도 이미 당해봤거나 당할 수 있는 것인데 조금 못사는 사람에게 좀 겸손할 수 없을까.
웃지 못할 일화 하나가 또 있다. 며칠 전에 푸에르토 갈레라라는 섬에 갔을 때의 일이다. 기념품 행상들이 내 앞으로 와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고 묻더니 『한국인』이라고 하자 대뜸 한국말로 『오, 진주목걸이 있어요, 산호반지 있어요』한다.
뒤에 안 일이지만 필리핀의 관광지에서 한국인이 주로 찾는 것은 진주목걸이와 산호반지로 소문이 나있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방금 한국인이 머물다갔다는 방에 묵었는데 그 방에 흩어져있는 「88담배」꽁초와 휴지들을 보고는 못 볼 것을 본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 용납이 안 되는 일은 남의 나라에 가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의 백화점에서 하녀유니폼이 진열되었다가는 불쏘시개 감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며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이 마닐라에서 정작 해야 할 일은 하녀유니폼이 왜 있어서는 안 되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똑바로 이해해야겠다. 다른 나라에서 추석 보름달처럼 맑고 향기로운 한국인의 체취를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애국이 있을까. <마닐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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