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중국의 존재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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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일본 신문에는 '중국의 존재감'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정치.경제적 역량을 넓혀가는데 일본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하느냐는 맥락에서다.

뉴욕 타임스도 최근 아시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결과 50년간 이 지역을 장악해 왔던 미국의 영향력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기울어간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및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담을 지켜본 미국과 일본 언론의 소감이다.

사실 한.중.일 3국 중 주변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해온 나라는 중국이다. 한국과 일본에는 이미 지난해 3국간 FTA 체결을 공식 제의했고, 아세안 10개국과는 2010년 체결을 목표로 FTA 협상을 진행 중이다. 2006년까지 쿤밍(昆明)에서 태국.베트남.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싱가포르를 모두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관계국들과 함께 정비하기로 했다. 러시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이 속한 상하이협력기구(SCO)에도 FTA 체결을 정식으로 제안했다.

경제협력뿐만이 아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은 주변국과의 우호관계 구축에 적극적이다. 인도와는 국경 분쟁을 매듭짓는 회담을 시작했다. 아세안과는 우호협력 조약에 서명하는 등 정치적 유대를 다지고 있다. 한.중.일 3국 정상이 발리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은 중국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 정경분리를 앞세우며 한.일과의 정치적 연대를 꺼리던 예전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이 이처럼 국제무대에서, 특히 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후진타오(胡錦濤)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 이어 호주를 방문한 것은 그 같은 의문에 넌지시 대답하는 바가 없지 않다. 胡주석의 방문과 때를 맞춰 중국은 호주의 천연가스를 25년간 2백10억달러어치나 공급받는 의향서를 맺었다. 호주는 이로써 중국의 최대 천연가스 공급국이 된다. 지난해에도 인도네시아와 카타르를 제치고 비슷한 규모의 천연가스 공급 계약을 중국에서 따냈기 때문이다. 1996년 존 하워드 총리가 취임한 이래 호주와 중국의 교역량은 세 배가 늘어 지난해엔 1백61억달러였다. 중국은 지금 호주의 3대 교역국이지만 5년 안에 일본을 제치고 최대 교역국이 될 것이라는 게 호주 관리들의 말이다. 호주가 최근 호황을 누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중국이다. 이런 처지의 호주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은 미국 주도로 형성되는 반중 연대에 참여해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일 것이다. 아시아를 담당하는 미국의 보안관, 호주는 바로 그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부시 대통령에 이어 胡주석을 초대한 게 아닐까.

중국은 최근 들어 미국에는 입 속의 혀 같았다. 중국이 돌아서면서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유엔 안보리 이라크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될 수 있었고, 6자회담은 중국의 노력에 전적으로 기대는 모습이다. 그래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이래 지금처럼 관계가 좋은 적이 없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 지금 군사력으로 미국과 맞서겠다는 나라는 없다. 허나 미국의 일방주의를 묵묵히 추종하기도 불안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으로 미국에 맞설 것인가. 우선 중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웃는 얼굴(?)인 것 같다. 그 다음엔 고속으로 성장해 온 경제력을 앞세워 외교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게 아닐까.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