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의 소리,천심의 소리 안들리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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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본지 25돌 여론조사가 정치에 보내는 메시지
우리 국민은 꿈이 있는 민족이다. 또 그 꿈을 실현하는 데도 자신을 갖고 있다. 아무리 현재가 암울한 조건들로 차 있더라도 미래지향적인 꿈을 소중히 가꾸고 낙관하는 역동성과 잠재력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민족성의 기조는 중앙일보가 창간 25돌 기념으로 실시한 국민생활의식 조사결과에서 다시 확인된 것을 우리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치분야조사결과(어제 날짜 보도)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좌절감,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냈지만 나라의 장래에는 낙관하고 있다.
국민들은 정치불안을 가장 심각하게 우려하고 정치지도자들을 질타하면서도 10년 후 우리는 지금의 일본수준에 다다르고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보다 더 행사할 것이라는 낙관적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이율배반으로 느껴질 여론의 이러한 기저를 뒤집어보면 국민들은 정치권 전체에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는 증좌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각자 제 몫을 다할 의지를 품고 있는데 정치권 너희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는 준엄한 질책,바로 그것이다.
국민의 80.8%가 현시국을 불안해 하며,정치인ㆍ공직자ㆍ지도층이 시국불안을 조성하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89년에 비해 거의 두배로 늘어난 64%의 국민이 지지할 정당을 못찾고 있고,국회는 제 역할을 못하는 기관으로 첫 손가락에 꼽고 있다. 노 대통령과 3김의 인기 또한 땅에 떨어져 있다.
한마디로 국민은 여야 할것없이 지금의 정치와 정치인을 사회불안 조성요인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 민주정치의 요체는 민심정치다. 민심을 거스르는 어떤 정당,어떤 정치인도 존립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번의 추상같은 여론동향을 보면 여론을 선도하고 조직화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주요 기능은 지금 상태로는 작동불능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지금부터라도 소아적 당파 이기주의에 집착하는 대신 민심에 순명하는 길밖에 없음을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새삼 확인해주고 있다. 이 맥락에서 중앙일보 여론조사는 정당과 정치인들이 가야만 할 몇가지 구체적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정부와 여당은 내각제개헌을 포기하라는 여론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일이다. 85년부터 88년까지의 조사결과는 대통령제가 우세했으나 내각제에 대한 지지도 만만찮았다. 특히 대통령직선제를 겪고난 88년 조사에서는 대통령제(35.1%)와 내각제(34.6%)가 호각지세였으나 여권이 내각제개헌론을 시사한 89년엔 대통령제(73.1%)가 내각제(14.0%)를 압도했고 이 기조는 이번에도 지속(67.5% 대 12.9%)되었다.
이러함에도 여권이 내각제개헌을 추진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시국불안 조성의 주요인을 자초하게 될 것임을 신중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둘째,정국안정의 급선무다. 두개씩 응답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정국안정이 지난해와는 달리 첫번째로 꼽혔다는 데 정치권은 맹성해야 한다. 정치권이 「동반자살」을 원하지 않는다면 국회의 불구화,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의 구조화를 한시라도 빨리 해소해야 한다.
국민 각 계층과 부문간의 갈등의 해소라는 정치권의 기능을 운위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간의 맹목적이고 아집에 찬 갈등부터 풀라는 것이 국민들의 갈망이다.
셋째,노 대통령과 3김씨는 보신책의 강구와 대권다툼의 유리한 환경조성에만 빠져온 지금까지의 행적을 대오각성해서 지도자로서의 경륜을 보이라는 주문이다.
노 대통령과 3김씨가 「정계를 떠나야 될 사람」으로 전두환 전대통령보다 훨씬 더 엇비슷하게 지목됐다는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부끄럽게 느낀다면 결단을 내려 민심에 순명하는 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권은 통합하라는 것이다. 야권이 통합할 경우는 지지율이 급상승할 것으로 여론조사는 보장하고 있다. 민자당에 대한 지리멸렬한 지지율과는 정반대여서 국민의 바람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정치권은 이처럼 냉혹하고 추상같은 국민여론에 순응하는 길만이 스스로의 위태로워진 존립기반을 회생시키는 최소한의 방책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가 우리 국민의 역동적 잠재력을 더 한층 일구어내어 나라와 민족의 부강과 통일을 앞당기는 본연의 책무를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10년 뒤의 우리니라가 잘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국민들의 일견 모순되는 여론은 곧 그러한 국민들의 미래지향적 의지를 정치가 활성화시켜달라는 강력한 요구를 나타낸 것이다. 이 점을 정치인들은 다음 총선과 결부시켜 신중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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