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연기 연락도 못했어요”/수재로 혼례늦춘 심광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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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양가 모두침수 대피소서 만나/빌린 혼수 비용 갚을길 “막막”
『전생에 무슨 큰죄라도 지었는지 만 8년을 기다린 결혼식이었는데….』
15일 오후2시로 예정됐던 결혼식을 홍수때문에 연기할 수밖에 없게된 신랑 심광보씨(29ㆍ고양군 송포면 법관1리)는 눈물을 감추려는듯 고개를 돌렸다.
담장에는 아직 황토진흙과 찢겨진 라면봉지 등이 곳곳에 엉겨붙어 있었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웬만하면 결혼식이라도 강행하려 했지만 이웃동네에 사는 신부 김은미씨(27ㆍ법관2리) 집도 완전히 물에 잠겨 양가 모두 도저히 식을 올릴 형편이 안되는 것이다.
82년 동네 교회에서 만나 8년동안 2백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날을 기다려온 신랑ㆍ신부의 장미빛 꿈이 산산조각난 것은 12일 새벽.
제방을 무너뜨린 한강물이 결혼준비에 한창이던 양가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물이 들이닥쳤을때 제일 먼저 며칠전 받은 며느리 예단이 생각나더군요.』
아버지 심재국씨(55)와 어머니 이정순씨(54)는 「결혼예물에 진흙물이 묻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약속이나 한듯 건넌방에 있던 이불 등 예물보따리를 들고 대피했다.
수재민이 수용된 부근 대화국민학교에서 만난 김양부모의 손에도 4일전에 보낸 함가방만이 쥐어져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를 위로한 양가 가족들은 결국 결혼을 무기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첫딸의 혼인이라 다섯집이나 찾아다니며 혼인날을 받았는데….』
신부측 부모는 홍수가 자신들의 잘못때문이기라도 한듯 송구스러워했다.
청첩을 보낸 하객들에게 결혼식 연기소식을 전하려 했지만 전화와 교통이 모두 끊겨 연락을 할수도 없었다.
할수없이 양가식구들이 15일 오후2시 식장으로 나가 하객들을 맞고 연기사정을 말해야 했다.
『이번 홍수로 5천여평의 논이 모두 쑥밭이 됐어요. 둘째 광보녀석 장가들이기 위해 농협에서 빌린 5백만원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할 뿐입니다.』
아버지 심씨는 14일오후 물이 빠져나간 집안에 들러 황토와 쓰레기 투성이의 방을 청소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중 둘째인 광보를 제치고 셋째(28)와 넷째(26)를 먼저 결혼시켜 가슴이 아팠는데…하늘도 무심하시지….』
김양의 부모도 『2천평 남짓한 농사를 바라보고 사는데 이번 수재로 벼를 모두 망쳤으니 딸 시집보내려고 빌린 6백만원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고양=최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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