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길의 첫걸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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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남북 총리회담 선전장 되어선 안된다
남북한 고위급회담의 일정이 확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분단후 최초의 총리 접촉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이라 할 수 있는 이번 회담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우선 환영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반가움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환호보다는 냉정한 마음이 앞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동안 기대를 부풀게 하던 남북한 교류를 위한 여러차례의 시도가 실현 직전에 좌절된 데서 오는 실망과 환멸의 쓴 맛을 잊지 못하는 탓이다.
지난 경험에서 우리는 새로운 여건에 따라 통일을 위한 남북한 대화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인식은 절실하면서도 대화당사자들이 아직도 냉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얼마전 범민족대회를 전후해 남북한 왕래를 무산시켰던 북한의 논리가 이번 회담을 앞두고 연상되는 것도 우리가 들뜬 마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가 되고 있다.
예비회담에서 성격을 규정했듯이 이번 회담은 「남북간의 정치ㆍ군사적 대결상태와 다각적인 교류ㆍ협력 실시문제」를 논의하기로 되어 있다. 정치ㆍ군사문제의 해결을 앞세우는 북한측의 주장과 다각적 교류ㆍ협력을 통한 신뢰구축단계를 거쳐 정치ㆍ군사문제를 논의하자는 우리측 안을 절충한 형식이다.
그러나 이번 회담대표단 구성에서 북한측은 남북한의 다각적인 교류문제를 논의하자는 형식은 갖추면서 군사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측은 당초 예비회담에서 군사문제를 다루기 위해 합의한 2명의 군관계자 이외에 군축문제 전문가를 추가하고 있다.
우리측이 군관계자 한 명을 대표단에 포함시킨 데 비해 북이 3명의 군사관련 인물을 내세운 사실은 회담에 임하는 기본 입장이 그만큼 상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본입장의 차이는 회담 벽두부터 의제의 내용,우선순위를 두고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을 예상케 한다.
우리측이 군비통제로 가는 과정으로서 경제와 인적 교류를 통한 신뢰구축을 모색하는 데 비해 북한측은 유엔가입문제ㆍ주한미군 철수 등 정치ㆍ군사문제를 앞세울 의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상되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우리가 비관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회담에서 어떤 구체적인 결실보다는 새로운 변화의 시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남북한 관계자들이 자주 접촉하여 상호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하나하나 불신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데서 우리는 이번 회담을 환영하며 들뜨지 않은 판단력으로 그 경과를 지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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