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수뇌 '몸 사리기' 시민들만 골탕 먹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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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서울 도심에서 열린 공공연맹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노조원들이 교보 소공원 인근에서 차로를 막고 정리집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28일 오후 4시30분 서울 세종로 일대엔 길게 꼬리를 문 차량들이 연신 경적을 울려댔다. 종로 1가에서 세종로 방면의 4개 차로를 시위 중인 공공연맹 노조원들이 모두 점거하는 바람에 차량들이 반대쪽 차로로 왕복 소통하느라 대혼잡이 벌어진 것이다. 일부 운전자는 시위대에게 "뭐 하는 짓이냐"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음식점 등 이 일대 상가들도 교통 통제의 여파로 울상이었다. 회사원 윤기준(28)씨는 "버스가 꼼짝도 안 해 중간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며 "교통 혼잡을 야기하는 이런 집회를 왜 허가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 허가받지 않은 도로 점거=이날 공공연맹 소속 전국철도노조와 비정규직 대책본부, 4대 보험 통합 반대 대책위는 각각 서울역광장과 을지로 훈련원공원, 종묘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노조원들은 공공연맹 노동자대회를 위해 각각 2개 차로를 막고 종로와 을지로.세종로 일대를 행진했다. 오후 4시쯤 세 곳에 나뉘어 있던 집회 참가자 8500명이 한꺼번에 세종로 교보 소공원 앞으로 모이면서 일대 교통이 완전히 마비됐다. 이들은 종로 1가에서 세종로 사거리의 도로 한쪽 방향을 완전히 막은 채 20여 분간 정리집회를 벌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집회는 당초 2개 차로를 막고 행진하는 것만 신고됐을 뿐 4개 차로를 점거하는 것은 예정에 없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대를 제지하진 않았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잠깐 정리집회를 하기 위해 4차로를 점거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정리집회 때문에 종로.세종로.을지로 일대는 차량이 시속 10㎞ 미만으로 서행해야 했으며 동대문까지 이어진 정체는 집회가 끝난 뒤에도 한 시간가량 계속됐다.

◆ 교통 혼잡 유발 집회 금지한다면서=경찰청은 지난달 27일 "교통 혼잡을 유발하는 집회를 제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도심 도로를 점거하고 행진하는 집회는 계속되고 있다. 22일 통일연대 등의 반미 반전 집회 때도 주최 측 신고와 달리 3~4개 차로를 점거한 채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 행진을 벌여 도심 교통이 마비됐다.

경찰 실무 관계자는 "집회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기 때문에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이 불허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그동안 계속 허가를 내주다 이제 와서 교통혼잡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하면 민주노총 등 사회단체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농민 시위 사망사건으로 수뇌부가 문책당한 경찰은 집회를 불허해 주최 측과 충돌을 빚기보다 차라리 교통 혼잡이 벌어져도 시위를 허용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모호한 법 규정도 문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2조 1항은 "경찰은 주요 도시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에 대해 교통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이를 금지.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12조 2항엔 "집회 주최 측이 질서유지인을 두면 1항에 의해 금지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경찰 관계자는 "법률 조항 자체가 상충되기 때문에 딱 부러진 조치를 내리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 서울광장의 모범 사례=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1년에 10여 건 이상 대규모 정치집회가 열리는 등 시위의 메카로 통했다. 하지만 이달 들어 서울광장에서 열린 정치성향의 집회는 '북핵 반대 촛불집회'가 전부다. 서울광장의 이 같은 변신은 서울시가 '좌.우를 막론하고 이념성향의 집회를 위한 광장 사용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내걸고 이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29일 가족과 함께 서울광장을 찾은 주부 김영순(33.중랑구 묵동)씨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광장은 시민들의 쉼터지 일부 시위대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며 정치집회 불허 방침을 반겼다.

한애란.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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