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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60분이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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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인생을 60분이라고 한다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력 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지만, 세상을 먼저 산 선배들은 그것이 채 10분을 넘기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 전력 질주하는 10분 남짓한 시간을 가리켜 우리는 '전성기'라고 부른다. 박치기왕 김일도 60분 인생으로 보자면 10분 정도가 그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지금도 원음방송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전설적인 앵커맨 봉두완씨는 1935년생으로 올해 71세다. 그는 자신이 기자로, 정치인으로, 교수로 살아보았지만 그래도 자기 인생의 절정이자 전성기는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에서 앵커맨으로 마이크 잡고 떠들 때였다며 호방하게 웃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69년부터 동양방송이 언론통폐합으로 간판을 내리던 80년까지 11년이다. 70여 년을 살아온 세월 중에서 11년이 그가 '날릴 때'였다면 그 역시 60분 인생에서 10분이 채 못 되는 전성기를 누린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성진씨는 자신의 회고담에서 '박 대통령의 입'으로 산 9년이 자기 인생의 알짜배기요 전성기라고 말했다. 김성진씨는 1931년생으로 올해 75세다. 60분 인생으로 보자면 그의 전성기 역시 10분에 모자란다. 하지만 그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신했다.

전성기란 단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며 남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시기만이 아니다. 전성기의 참뜻은 자기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신하는 시기다. 박치기왕 김일은 항상 수세에 몰렸다가 박치기 한 방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박치기는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 사람들에게 고단한 삶을 역전시킬 비장의 무기요 희망의 대명사였다. 그 희망을 주는 것이 그가 레슬링을 하는 이유였고 그의 존재의미였다. 영원한 앵커맨 봉두완씨는 사람들이 입 닫고 있을 때 대신 입을 열어 우리의 막힌 속을 뚫어주었다. 그것이 그가 마이크를 잡아야 할 이유였고 또 그 자신의 존재의미였다.

삶은 전성기를 향해 전력 질주하도록 본능적으로 프로그래밍돼 있다. 그리고 그 인생의 절정기를 지나면 마치 사정하고 난 뒤 고개 숙인 남자처럼 수그러진다. 박치기왕 김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184㎝에 140㎏의 몸무게로 살인적인 박치기를 날리던 김일도 89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것은 존 버닝햄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란 책의 첫머리에 적어놓은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당신의 인생에도 '오늘부터 너는 혼자 힘으로 양말도 못 신게 되리라'고 말하는 신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리는 그런 날이 꼭 올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기에 내 인생의 전성기는 더욱 소중하다.

60분 인생 중 10분 아니 단 5분짜리 단막극일지라도 내 인생의 전성기를 외면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사는 꼴과 형편을 봐서는 전성기란 말 자체가 우습다며 스스로를 폄훼하는 경우가 적잖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전성기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선언하자. 지금, 오늘, 여기에서 내 인생의 전성기를 만들겠다고. 바로 그 결심의 순간부터가 내 인생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