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그만!" 가정이 병들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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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26일 술에 취해 흉기를 휘두르던 남편을 부인이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가정폭력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에서 남편은 2000년 가정폭력으로 구속되고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법적 처벌에 대한 실효성 논란도 일고 있다.

◇"신고해도 소용없어"=지난해 경찰에 신고된 가정폭력 건수는 1만5천1백51건. 이 중 구속된 사람은 5백86명에 그쳤다. 신고하더라도 상습범이거나 흉기를 사용하는 등 특별히 잔인한 경우만 구속되는 게 대부분이어서 불구속 등으로 풀려난 가해자들이 오히려 "왜 신고했느냐"며 보복폭행을 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행법에서 가정폭력 가해자에게는 ▶형사 처벌이나▶법원의 접근금지 명령▶가정법률상담소 등 위탁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상담수강 명령 등이 내려진다.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지면 대개 한달간 가해자는 피해자의 주거지나 직장에서 1백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고 이를 어기면 형사구속된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신고 이후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1개월 이상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인 데다 접근금지 명령의 위반 여부도 제대로 감시되고 있지 않아 실제 폭력을 막는 데는 역부족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한달여의 기간만 지나면 다시 가해자가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어 문제가 반복되기도 한다.

◇"가정폭력엔 도리어 솜방망이"=가정폭력을 막기 위해 1998년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이로 인해 도리어 가정폭력 가해자가 일반 폭력범보다 약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여성의전화 가정폭력담당 김혜경씨는 "가정폭력특별법은 가정의 보호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처벌 의사가 없다고 밝히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피해자 쪽에서 가정폭력으로 신고한 후에 가족들의 회유나 협박, 보복에 대한 두려움,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들로 인해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김강자 과장은 "이번 사건의 남편도 경찰이 구속, 검찰로 송치했는데도 재판 도중 부인이 탄원서를 내 석방해 준 경우"라고 말했다. 우발적인 폭력으로 가정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가정폭력특별법의 취지가 악용된 경우라는 것. 김 과장은 "가해자가 석방된 후에라도 교정.교화할 수 있는 시설과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시설 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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