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교류꿈… 깊어진 불신“골”/남북 반쪽행사로 끝난「범민족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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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개방꺼린 북한측 거부가 주인/손발 안맞는 정부ㆍ재야도 문제/통일논의에 민간단체 처음 참여의 길 열어
범민족대회가 파행끝에 남북 평화통일의 한마당이 되지 못한 채 절름발이 대회로 막을 내렸다.
6ㆍ25전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 남북 민간교류행사로 「민족화해를 통한 통일에의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는 측면때문에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이번 범민족대회는 개최기간중 단 한명의 남북 민간인 교류도 이뤄지지 않아 「실체없는 대회」가 되고 말았다.
대회 추진과정에서 남북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호불신의 골만 깊게 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이는 근복적으로 원활한 남북교류에는 정부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데도 북측과 재야가 이를 철저히 배제한 가운데 시도한데서 비롯됐지만 사전준비 소홀로 국민에게 혼선을 준 정부당국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초 범민족대회는 재야인사들이 88년 8월 1천14명의 발기자로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결성,「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국민대회」의 개최를 제의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전민련등 재야단체들이 2년여 동안 대회성사를 위해 지속적 활동을 벌여왔지만 정부측의 냉담한 자세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난달 20일 정부의 「민족대교류기간」선포와 북측의 「판문점 개방」선언이 잇따라 나오면서 범민족대회는 가시화되기 시작,통일논의의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특히 지난달 23일 정부가 3부장관 기자회견을 통해 『각계 각층이 참여한다면 범민족대회를 허용하겠다』고 공식 선언하고 전민련측이 제1차 범민족대회 추진위원회를 개최,▲대회기간은 8월13∼15일로 하되 ▲13,14일에는 전야제 형식으로 서울ㆍ평양에서 문화ㆍ학술제를 개최하고 ▲15일에는 남북대표와 해외동포 대표가 판문점에 모여 본 회담을 개최한다는 내용의 세부계획을 확정 발표함에 따라 범민족대회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정부와 재야단체들간에 범민족대회를 놓고 협조채널이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26∼27일 서울에서 열렸던 제2차 예비 실무회담부터 범민족대회의 앞길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전민련측은 예비회담의 개최장소를 서울 아카데미하우스로 결정했으나 정부는 회담전날인 25일 돌연 경호상의 이유 등으로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로 변경,개최장소를 놓고 전민련과 정부사이에 이견이 노출됐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판문점까지 내려온 북측대표들은 개최장소 변경 등을 이유로 되돌아갔다.
그후 범민족대회는 58개 우익보수단체의 참여를 놓고 또 한차례 시련을 겪는다.
통일원은 『각계 각층이 대표로 참여해야 판문점 본회담등을 허용하겠다』는 정부입장을 수차례에 걸쳐 발표함으로써 우익단체들의 범민족대회 참여를 유도했다.
이에 따라 전민련과 보수단체들은 참가방법등을 놓고 지난 2일까지 3∼4차례에 걸쳐 협상을 벌였으나 전민련은 「자문위원 형태로의 참여」를 주장한 반면 보수단체들은 『대표단 참여』를 고집,이견을 절충하지 못했다.
북측은 나름대로 『보수단체들의 참여는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지속적으로 발표,정부ㆍ북측ㆍ전민련 등 3자간의 입장이 엇갈렸다.
결국 지난 3일 보수단체들을 배제시킨 채 범민족대회 추진본부가 출범함에 따라 범민족대회 본회담 개최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지기 시작했다.
또 지난 6일 추진본부가 평양 3차 예비실무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방북을 시도했으나 정부측이 『특정단체만의 방북』이라는 이유로 원천봉쇄해 무산됐다.
그러나 정부는 다시 『신변보장만 약속하면 민족대교류기간중 전민련등 특정단체의 방북을 허용하겠다』는 새로운 제안을 12일 내놓았지만 북측은 즉각 『우리정부와의 범민족대회에 관한 모든 협의를 중단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남북대표가 참여하는 판문점 본회담은 사실상 「물건너 간 얘기」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범민족대회는 서울과 평양에서 2원적으로 개최됐고 남북화합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같이 범민족대회가 「장미빛」으로 시작,「좌절」로 끝난 것은 처음부터 예상됐던 결과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범민족대회 같은 대규모 인적교류를 감당하기에는 북측과 재야단체,우리정부 모두 내부사정이 너무 복잡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동구 공산주의 붕괴가 자유교류에 기초했다고 판단,남한대표단이 대규모 방북이 몰고 올 개방압력 부담을 아직 감당키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라는 게 북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북한당국은 남측 추진본부가 판문점대회에 불참한 상태에서 남한 정부당국과 계속 갈등을 증폭시켜 나가는게 여러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민련등 재야단체의 경우 2년전부터 범민족대회를 계획해 오기는 했지만 정부의 7ㆍ20선언 이전까지만 해도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판단,치밀한 계획은 거의 마련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추진 과정에서 적잖은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정부도 막상 민족대교류 선언을 했지만 이것이 범민족대회와 연결되자 부랴부랴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대회참가단체 범위나 회담장소 등에 대해서는 며칠마다 방침이 변경되는등 「무원칙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범민족대회가 통일논의에 있어 민간단체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면에서 서로 갈등하는 3자가 이번대회 준비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3자사이의 공통분모를 더욱 넓힘으로써 진정한 교류를 이루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이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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