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조각 '희망의 불씨' 살아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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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각은 완전히 외면당하고 있어요. 육체적으로 힘들고, 재료비도 많이 들고, 그림에 비해 잘 팔리지도 않고….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요."

왕성하게 활동 중인 한 젊은 조각가의 푸념은 요즘 순수조각의 신세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1990년대 일정 면적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땐 건축비의 1%를 미술 장식에 써야한다는 법이 생기면서 순수 조각은 건물 앞의 대형 장식조각에 권력을 넘겼다. 이후 10여년이 넘게 순수조각은 발붙일 곳이 더 없어졌다.

그렇지만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다. 올해 순수조각을 지향하는 공모전이 처음 생긴 데다 갤러리 곳곳에서 여느해보다 활발히 다양한 조각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포스코의 청암재단은 올해 처음 '스틸아트 공모전'을 열었다. 그간 장식미술에 치우친 조각을 벗어나 조각 자체로 작품을 느껴보자는 취지다.

대상(상금 2000만원)은 작가 최우람의 '철의 심장'에 돌아갔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철의 테두리 속에서 꽃봉오리가 열렸다 닫혔다 하며 기계와 생명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표현한 작품이다. 최씨는 "순수 조각을 위한 공모전은 처음이다. 평소 생각했던 개념 작업을 맘껏 펼쳐 보았다"고 말했다. 대상과 더불어 예선에 오른 20개의 작품은 26일부터 11월 18일까지 서울 포스코미술관(02-733-0745)에서 전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뽑는 '올해의 작가'로 조각가 정현씨가 선정됐다. 올해의 작가에 조각가가 선정된 경우는 드물어 더욱 의미가 깊다. 현대미술관측은 "조각이라는 힘든 장르를 버리고 설치와 영상을 선택하는 요즘 상황에서 정현씨는 소명을 받은 사람처럼 조각에 열중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정씨는 기존 조각 재료를 벗어나 아스콘.막돌.석탄 등 다양한 재료의 물성을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12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02-2188-6231)에서 열리는 전시에서 가슴으로 느끼는 그의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재미작가 존배의 '수렴과 발산'전(29일까지.갤러리 현대.02-734-6111)엔 조수의 도움 없이 하루 10시간 넘게 홀로 용접 작업을 하는 장인의 숨결이 배어 있다. 조그만 철사를 하나하나 이어붙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기하학적 형태를 만나게 된다.

작아진 자연 앞에서 허탈해하는 오랑우탄, 등에 뿔이 난 여자, 열받아 날아오른 펭귄 등 한 공간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금중기의 '느슨한 충돌'전(28일까지.선 컨템포러리.02-720-5789)은 묵중한 메시지를 재미와 결합시켰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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