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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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 문학의 오랜 관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선택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다. 갈등과 고뇌와 과정을 애초부터 배제하고 무리짓기에만 길 들여져 온 이런 흐름은 그래서 보다 큰 세계로의 문학적 극복을 가로 막아왔다.
왜소주의로 우리 문학을 끊임없이 추락시켜 왔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또 하나의 절필 선언이라기 보다는 문학적 삶에 대한 하종오 시인의 고뇌에 찬 고백은 보다 양심적이고 진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직껏 우리 문학은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를 놓고 장벽을 쌓으려는 기미를 또다시 보이고 있다. 용어만 바꾸어 앉았다.
모더니즘에 의해 우리 문학이 예술로서의 본질적인 미학의 구조를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친 문학주의로 매도하거나 심지어는 외세의 침탈 현상 가운데 하나로까지 규정하는 것도 문제고 리얼리즘에 의해 우리 문학의 감상주의가 극복되고 보다 굵은 역사 의식·집단의식의 장을 열었음에도 이를 비 문학주의로 묶어버리려는 현상이 아직도 한 켠에 웅크리고 있음 또한 문제다.
아무튼 우리 문학이 열고 가야할 것들 가운데 가장 큰 골간을 이루는 세계가 여기에 있다. 좀 엉뚱할지 모르나 여기에 덧붙여 새롭게 제기되어야 할 문제로 「지역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지역문학이란 이른바 「지방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소위 중앙(서울)과 지방으로 분획된 종속적 관계로서의 하위개념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늘 우리의 지방문학은 불만의 온상이었고 중앙에 대한 비겁한 기웃거림이었다. 문학의 진정한 가담은 이런 양태의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오늘의 삶에 대한 치열한 투사행위일 뿐이다. 그 개성일 뿐이다.
종속관계가 아닌 균형 관계로서의 진정한 「지역문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문학을 개성의 가장 대표적인 소산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문학의 로컬 컬러. 그건 아주 소중한 것이다. 왜 우리는 영랑의 시들을 사랑하고 백석의 시어들을, 미당의 화법을 매력에 찬 것으로 수용하는가. 그런걸 키워가야 한다.
더군다나 지금 우리는 누가 뭐래도 오고야말 통일의 시대를 앞에 놓고 고뇌해야 할 때다. 저쪽 문학과의 접합과 극복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힘의 우위성으로 그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가.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 물리적인 힘의 세계보다도 문학은 보다 본원적인 힘의 세계를 언제나 지향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북쪽의 문학을 염두에 둔 「지역문학」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90년대의 우리문학이 열어가야 할 가장 현실적인 대목이 여기에 있다. 실로 소박한 필자의 문학개량주의다. <시인·『현대시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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