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에 밀리는 프랑스 노천카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프랑스 파리 시내 북부 몽마르트르 언덕 입구에 있는 '뒤물랭' 카페. '두 개의 풍차'라는 뜻의 이 카페는 프랑스 영화 '아멜리'의 무대가 돼 유명해진 곳이다. 겉모습은 당장이라도 아멜리가 문을 열고 뛰어나올 것만 같은 전형적인 파리의 카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단골들이 가벼운 식사나 음료를 즐기며 담소하는 영화 속 풍경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최근 많은 변화가 생겼다.

어둠이 깃들면서 뒤물랭은 볼륨을 최대로 올린 스피커가 요란한 음악을 토해내는 록카페로 변한다. 하나 둘 모여든 젊은이들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며 맥주나 칵테일을 홀짝인다. 그들이 몸을 비벼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선지 영화에서 나오던 담배 판매대도 없애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카페의 주인이 바뀐 이유도 있지만 주고객층의 생활 패턴과 기호가 변한 것이 더 큰 이유다. 3년째 뒤물랭에서 일하고 있는 파트리크(35)는 "단골 고객층이 갈수록 얇아져 젊은 세대를 끌어들일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단골이 줄어든다는 것은 카페의 주고객층인 30~40대가 과거보다 훨씬 바빠진 삶을 사느라 카페를 찾을 여유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커피 등 음료뿐 아니라 술과 음식까지 판매하는 프랑스의 카페는 역사적으로 철학자.작가.혁명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고 토론하는 장소이자 시민들이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여름날 노천 카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책을 읽거나 친구.친지들에게 엽서를 쓰는 모습은 파리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한경쟁을 수반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그러한 여유는 놀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에게도 이미 사치가 돼 버렸다. 역설적이기는 해도 주 35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근무시간이 줄어든 대신 업무 강도는 훨씬 높아진 것도 여유를 빼앗긴 한 요인이다.

"카페요? 천만에요. 주중에는 점심도 샌드위치로 때우는 날이 허다한 걸요." 일주일에 두번쯤 퇴근 후 뒤물랭을 찾아 춤을 추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회사원 장 뤼크 스타소(29)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흔들어댔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뒤물랭처럼 변신하지 못한 카페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아야 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1960년대 20만곳이 넘던 프랑스의 카페가 오늘날에는 5만곳에도 못 미친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헤밍웨이.피카소 등이 단골이었던 생 제르맹 데프레 지역의 '카페 뒤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 스타들의 단골집이었던 샹젤리제의 '푸케트' 등 유명 카페가 명목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 관광객 덕분이다. 나머지 카페들도 젊은층의 눈을 끌기 위해 재즈.인터넷 등 테마 카페로 탈바꿈하거나 실내 장식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카페가 없어진 자리는 패스트푸드점들이 채웠다. 93년 이후 새로 문을 연 음식점의 70% 가까이가 맥도널드를 비롯한 패스트푸드 전문점이다. 사전으로 유명한 라루스 출판사의 쥘 샹셀 시사담당 국장은 "오늘날 젊은 층은 점심 식사를 위해 두 시간 동안 식당에 앉아 있기보다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며 인터넷을 뒤지는 데 더 익숙해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이미 젊은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과거 프랑스인은 포크와 나이프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을 야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햄버거를 손으로 들고 먹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프랑스인이 60%에 달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프랑스인은 카페에서 맛있는 스테이크와 프리트(감자튀김)를 먹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할 준비가 돼 있다. 그 수가 빠르게 줄고 있기는 해도 말이다.

◇아멜리=국내에 '아멜리에'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파리 몽마르트르 입구의 카페에서 일하며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주인공 아멜리의 가슴 떨리는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음악을 들으며 수다를 떨고 고독을 즐기며 때로 남의 간섭도 받는 우화적인 모습의 카페와 그 속의 인간 군상을 독특하게 다뤘다. 규격에 꼭 맞는 멋을 넘어서 자유분방하며 재기발랄한 환상적인 카페의 매력을 다뤘다는 평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