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해사 강조로 통일신라 불인정"|본사-대륙 연 북한연구세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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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중앙일보사와 대륙연구소(회장 장덕진)가 공동 주관하는 북한연구세미나가 지난 13일 각 분야의 북한전문가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김정배 교수(고려대)가「북한의 고대사관과 정권의 정통성」이라는 내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김 교수의 발표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주>
북한은 정권수립 직후인 48년 10월2일 내각 제4차 회의에서 교육상에게 조선역사편찬위원회를 구성토록 결정, 고대사연구의 새 장을 열게 됐다. 교육상은 49년 1월13일 편찬위원 및 4개 분과위원회(원시사·고대사·봉건사·최근세사)의 위원선임 결과를 발표했는데 고대사분과 위원회에는 한길언·최영환·전몽수·황병삼·김승화 등 이 포함됐다.
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고대사 연구는 고조선의 강 역과 사회성격 구명에 집중됐다. 이것은 북한 역사학계의 학문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지만, 이밖에도 북한이 민족사의 시초인 고조선 연구작업을 정권의 정통성과 연계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사관이나 북한의 자주노선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김석형의「삼한삼국 분국 론」은 주목할 만한 글이다. 김석형은 이 글에서 일본 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실증적으로 비판했다.
대체로 북한에서는 67년까지는『역사과학』등의 학술잡지를 통해 역사학 연구의 성과가 나타났지만 그 뒤 10년간 학술잡지 발행이 중단됐다.
다시 복간된 학술잡지는 예전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졌고「정치성」짙은 글들이 다수 포함되기 시작했다. 고대사 분야에서도 국수주의 경향이 깊숙이 들어왔고 고대사의 주요 부분이 체제유지를 위해 이용됐다.
예컨대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보면서 그 강 역을 요령성 일원까지로 주자 했던 북한학계가 민족기원발생에 관한「한반도 기원 설」을 제창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평양 주변의 구석기 유물발굴을 근거로 우리민족의 본토기원 설을 내놓고 있는데 이것은 민족기원을 평양중심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다. 이 같은 민족기원 설은 우리역사의 시 원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다.
북한은 또 삼국통일 문제에 대해서도「정치적」해석을 가했다. 북한의 역사학계는『신라를 통일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발해를 조선역사에서 떼 내려는 것이며「신라 중심 설」과「신라정통성」을 내세움으로써 남한의 북진통일론에 그 어떤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어용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력사 과학』 85년 3호). 북한에서 발간된『조선전사』는「통일신라」를「후기신라」로 명명하고 있다.
작년에 열린 유럽 「한국학」회에서 북한의 역사연구소 전영률 소장은『7세기말 이후 약 2백20년간 조선역사 위에는 대동강 북쪽에 발해, 그 남쪽에 신라가 범존 하는 두 나라 시기가 있게 되었다』면서 신라가 통일국가는 아니었으며『첫 통일국가는 고려』라는 주장을 폈다.
오늘날 북한은 자신의 민족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고구려일발해사」를 강조하고 통일신라를 후기신라로 폄 하하고 있다.
금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유럽·「한국학」회에서 북한측 학자가 발표한「발해 동경 용원 부-혼춘 팔련 성 설 재검토」라는 논문을 보면 동경 용원 부는 종래 통설로 굳어져 있던 혼춘이 아니라 함북 청진시 청암 구역 부 거리였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처럼「혼춘」설을「청진」설로 바꾼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발해의 수도가 그처럼 남쪽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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