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의 갈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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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윤보선 전대통령의 아호는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그는 벌써 우리나라 정치사의 풍운을 한몸에 끌어 안고 있었다. 해위는 바로 「갯벌의 갈대」라는 뜻이다.
해위라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일들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5ㆍ16 군사쿠데타를 맞은 날 아침,혁명주체세력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을 남긴 일이다. 또 하나는 바로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장군과 대통령 선거에서 겨루어 패배한 뒤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을 지칭해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했었다.
『올 것이 왔다』는 말은 쿠데타를 내심 고대해 왔고,양해한다는 뉘앙스가 은연중 풍긴다. 해위는 그로인해 몹시 곤혹스로운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5ㆍ16이 10년쯤 지난 뒤 그는 회고록에서 그 말의 진의를 밝힌 적이 있다.
『…그 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해 볼 때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나라엔 영일이 없었다. 3월 위기설이니,4월 위기설이니 해서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 「올 것이 왔다」,즉 「달갑지 않은 것이 기어이 왔구나」하는 한탄하는 심정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이 말이 진짜 진의인지 아닌지 분별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해위는 대통령을 물러나고 나서 그 누구보다도 군사정권에 맞서 정면에서 집요하게 투쟁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해명은 다시 들을 필요가 없었다.
「정신적 대통령」이라는 말 또한 우리나라 정치사의 어두운 단면을 함축하고 있다. 선거의 공정성,정직성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해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정신적」이라는 말로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을 망정 그 선거를 뒤집는 운동은 벌이지 않았다. 선거의 결과에 간접적으로나마 승복한 셈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민주화운동으로 하여 박정권의 군사재판에서 15년 구형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을 음모하는 자리엔 언제나 그가 있었으며,민주화를 요구하는 가두시위의 현장에도 해위노인은 있었다.
그런 해위도 제5공화국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는 칩거만 했다. 의도적인 침묵이라는 비판의 소리도 들어야 했다. 『싸우는 게 최선은 아니고 싸우는 게 유일한 방법일 때 싸워야 한다.』
새삼 그의 어록이 생각난다. 그 해위도 이제는 명부의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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