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슬로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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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슬로그(slog)는 '무거운 발걸음' '어려운 싸움'등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단어가 권투용어로 쓰이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슬로그 펀치(slog punch)는 '아주 강하게 휘두르는 주먹'을 말한다.

최근 미국에서 이 '슬로그'라는 단어를 놓고 말들이 많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자신의 메모에 이라크의 최근 상황을 '슬로그 오브 워'(Slog of War)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고전적 해석을 따를 경우 이 메모는 '진흙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슬로그 펀치'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정반대로 '두들겨패는 전쟁'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전론자들과 민주당 등은 전자의 의미로 이를 해석하고, 이라크 전쟁에 관한 럼즈펠드의 잘못된 인식이 본인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럼즈펠드는 이를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는 지난 23일 미 국방부 기자실에 예고없이 나타나 슬로그는 '세게 친다'는 의미라며 그것이 바로 미국이 지금까지 해왔고 계속하려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그의 인식이나 세계관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라크 전쟁 발발과 9.11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네오콘)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이데올로기화한 확고한 신념과 이를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집행력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에서 이런 네오콘들의 신념과 집행력이 정책으로 반영된 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행정부 내의 정책결정 구조가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기 때문이다. 네오콘은 변할 수 없다. 단지 미국의 정책만이 변할 수 있다. 미국의 정책이 변한다면 이는 네오콘의 세계관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책을 결정하는 미국의 시스템이 '네오콘이 아닌 다른 의견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럼즈펠드 메모에 비친 단어의 속뜻이 그의 후회이길 기대하기보다는 미국의 정책결정 시스템이 네오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