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의 공장 방화(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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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밤새 혼자 텅빈 공장에 남아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기계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덜컥 무섭기 시작했어요. 일요일에도 나는 남들처럼 놀러가거나 쉬지도 못하는 것이 서럽기도 했고요. 기계를 태워버리면 이 지긋지긋한 일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9일 오전9시 서울 종암경찰서 형사계 보호실.
홀쭉한 키에 반바지차림의 신모군(16ㆍ서울 방학동)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용서해달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신군은 일요일인 8일새벽 혼자 야근을 하다 석유를 빈 맥주병에 담아 불을 붙인후 공장출입문에 던진 혐의로 붙잡혔다.
『문에 불이 붙는 순간 건물안에서 자고있는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 곧바로 원단조각으로 불을 껐어요.』
부모가 함께 야채행상을 하고 형과 동생 등 다섯식구가 방 2칸짜리 무허가판잣집에서 사는 신군에게는 애당초 고등학교진학은 남의 일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중학교를 졸업한뒤 1년남짓 웨이터생활을 한 신군은 숙식이 제공되고 형(18)과 함께 일할수 있는 스웨터공장에 취직했다.
6개월만에 월급이 27만원이 되고 무엇보다 형과 함께 일할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매일 오전8시30분부터 오후7시30분까지 쉬지않고 11시간씩 하는 노동이 신군에게는 점점 고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요일의 잦은 야근때문에 다니던 교회마저 그만둬야 했고 공장생활 8개월만에 친구마저 아무도 없게됐다.
일이 끝난뒤 1백원짜리동전 3∼4개를 들고 인근 전자오락실로 가는 것이 신군의 유일한 즐거움이 돼버렸다.
『공장에는 이제 다시는 안갈래요. 너무 힘들고 점점 바보가 돼가는 것같아요.』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신군의 힘없는 얼굴에서 대망의 2000년대를 앞두고 번영한국의 뒷면에 드리워있는 그늘을 보는 것같아 안타까웠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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