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학의 새 단계』펴낸 서울대 교수 백낙청씨|"문학이 사회과학 이론 좇는 건 못 마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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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문학평론가 백낙청씨(52·서울대 영문과교수)가 평론집『민족문학의 새 단계』(창작과 비평사 간)를 퍼냈다. 66년『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면서 권두 논문으로 발표한「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로 현실 혹은 상황에 대한 응전력을 잃은 순수문학주의에 선전포고를 한이래 백씨는 줄기차게 민족·민중운동의 현장에서 민족문학의 이론을 이끌고 있는 민족문학의 대부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Ⅲ」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민족문학의 새 단계』는『민족문학과 세계문학』(78년),『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79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Ⅱ』(85년)에 이은 백씨의 4번째 평론집으로 5공 말기의 폭압적 상황과 거기에 맞선 민주화 요구가 폭발하던85년 이후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제1부에는 민족문학운동의 이념정립에 기여하면서 민족문학의 현 단계를 구체적으로 짚어본 글들을, 제2부에는 서양문학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글들을, 제3부에는 작가론·작품론을, 제4부에는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문학론들을 모았다.
백씨가 머리말에서 밝히고있듯「그전에 비해 많이 달라진 듯도 하고 아무 것도 안 달라진 듯도 한 헷갈리는 세월」「여전히 괴로우면서 옛날처럼 명료한 맛도 없는 세월」로부터 나온 이 평론집은 민족문학의 80년대 성과와 문제점을 반성하고 90년대의 새로운 방향을 여는 이정표 역할을 할 것 같다.
-민족문학은 어떠한 문학을 뜻하는 것인가.
『절박한 민족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의식을 가지고 하는 참작과 비평 등을 뜻한다. 4·19이후 진전된 참여문학은 어떤 식으로 참여문학을 할 것인가가 구체화되면서 민족문학이란 개념으로 수렴됐다.』
-민족문학·민중문학이란 명칭이 혼용되고 있고 순수문학 쪽에서도 민족문학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순수문학 쪽에서는 민족문학을 한국인이 한국어로써 표현한문학으로 보아 단순히「한국문학」개념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민족문학은 민족적 현실을 민중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대응하는 문학을 뜻한다. 내가 내세우는 민족문학을 충분히 민족적이지 못하다며「소시민적 민족문학」이라 부르고 민중을 강조,「민중적 민족문학」을 내세우거나 나아가 계급적 관점을 강조,「노동해방문학」 을 주장하는 논자들도 있으나 민족문학은 이모든 개념을 다 포괄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구체적 현실이 민중·계급 등의 개념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후반부터 당신이 쌓아온 민족문학론을 80년대 후반 들면서 더 한층 진보적인 젊은 논자들이 공격하고 있는데 당혹감이 들지 않는가.
『후배가 선배를 비판하고 나오고 같은 자리에 어울려 격론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고 문단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앞으로도 활발한 비판과 상호토론이 있었으면 좋겠다.』
-계급·분단·모순·사회 구성체 등 80년대 후반 들어 민족문학론이 너무 사회 과학적으로 흘러 문학이라 부르기조차 힘들다는 비판도 있는데.
『사회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문학이 사회과학이나 운동권에서 나오는 이론을 뒤쫓아가는 것을 나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이 현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기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몰아붙이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80년대 민족문학의 성과와 문제점은 무엇이며 90년대에 대한 전망은.
『민중·계급 논의로 확산되면서 80년대는 그야말로 민족문학의 열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깊이 있게 진전되지는 못했다. 젊은 세대들은 민중·계급을 앞세워 70년대 이래의「소시민적 민족문학」을 극복했다고 하는데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사물과 현상을 평면적·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여러 측면에서 보면서 실천과 연결시켜야 한다.
민족과 민중, 혹은 계급·현실과 예술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민족문학이 갖고있는 변증법적 가능성을 살리고 구체화시켜야한다. 배타적인 논리나 상투적으로 흐르는 작품은 이제 냉정히 비판되고 극복돼야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90년대 들어 비록 양적으로 확산된다 할지라도 민족문학은 문학으로서의 설 땅을 잃을 것이다. 민족문학이 배타적 개념이 아니라 세계문학 속의 우리 민족문학이 되려면 수준 높은 예술성이 드러나야 한다.』
-현실에 대응하는 것으로 민족문학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사회적 활동과 맞물리게 되는데.『이것저것 걸리는 일이 많아 비평가나 연구가로서 본연의 작업에 집중하지 못해 늘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잘못된 시대상황이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저런 일감을 떠맡기니 고맙기도 하다. 내 능력이 부쳐 비록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내 문학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의심해보기도 한다.
책상 위에서 줄곧 원고지에만 매달린다해서 좋은 문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해야 좋은 문학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내 본연의 문학활동과 현실참여활동을 어느 선에서 조정해야 하는가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재야정당인 민중당 창당의 핵심멤버로 알고 있는데.
『「민중의 정치 세력화」원칙 표명에만 동의하고 정당인으로서의 활동에서는 빠지겠다고 했는데 어정쩡한 상태가 됐다. 현재 재야의 정당활동 등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70년대 이래내 현실참여 경험으로 미뤄보아 현재 내가 뛸 수 있는 처지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까 고민하고 있다.』
-비평의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인가.
『작품에 대해 훌륭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작품 자체의 창조성을 분석·평가해야된다. 「창조적 비평」이라는 미명아래 비평가의 창조성을 내세워 작품을 들먹이면서도 작품의 진실과는 무관한 비평가 개인의 이론이나 감정을 덧씌우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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