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우아한 자태의 그를 중국인들은 '우리의 제1부인(영부인)'으로 부르며 사랑했다. '메이(美)'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메이'는 누이를 뜻하는 '메이(妹)'와도 발음이 같다. 그는 전 중국인의 '아름다운 누이'였다.
그러나 '치파오 사건'으로 그는 19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 때 호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치파오가 봉건.자본.수정주의의 상징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13일 베이징(北京)에서 세상을 떠났다. 85세.
정치적으로 메이는 불행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꼽혔던 남편이 69년 똥물까지 마시는 등 온갖 모욕을 당한 끝에 사실상 홍위병들에게 살해됐기 때문이다. 그는 76년 마오가 죽고 난 뒤에야 남편의 유해를 만났다.
'치파오 사건'도 실은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 그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꾸민 일이었다. 심지어 이름에 미국을 나타내는 '미(美)'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다가 67년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투옥된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78년 명예가 회복됐으며, 정치협상회의 위원을 맡았다. 오랜 옥살이로 고질병을 앓았으나 90년 기력을 되찾은 뒤 사회 봉사를 하며 아름다운 노년을 살았다.
95년 그는 농촌 산간벽지 가정의 빈곤 부녀자들을 돕기 위해 '행복공정(幸福工程)'을 조직했다. 자신은 조직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행복공정은 지난해 말 현재 3억1000만 위안을 투입해 29개 성.직할시.자치구에 389개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농촌 가구 15만4000가구, 69만5000여 명에게 자금과 의료 서비스를 지원했다.
베이징=진세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