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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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제2막 제2장에는 로미오가 원수인 캐퓰렛가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 애인 줄리엣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2층 베란다에 나온 줄리엣은 이런 대사로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오,로미오 로미오. 저의 원수는 오직 당신의 이름뿐이에요. 몬타규가 아니라도 훌륭한 당신. 몬타규가 뭐예요. 그것은 손도 아니고,발도 팔도 아니고,얼굴도 아니고,사람의 몸에 달린 것이 아니예요. 이름을 바꾸세요.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같은 향기가 나지 않나요.』
그러면서 줄리엣은 자기것도 아닌 이름은 버리고 그대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받아달라고 애원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이름(성)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다.
우리나라에는 「인사유명 호사유피」란 말이 있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뜻이다. 그만큼 우리는 예부터 이름을 존중해왔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동서고금 어디나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특히 우리네의 이름에 대한 집착은 남다른 데가 있다.
가령 서양사람들은 손위 사람의 이름도 애칭으로 부르는 게 예사며 아버지가 아들이 귀여우면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게 하여 2세니,3세니 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나 조상의 함자를 댈때는 으레 무슨자 무슨자라고 글자로 설명하지 이름 그대로는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름 석자를 짓는데도 오행에 의한 성명철학을 들먹이고 또 항렬를 까다롭게 따진다. 이름 하나에 사람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생각에서다.
법원 행정처는 호적업무등의 전산화 기계화를 위해 내년부터는 이름에 어려운 한자를 쓰지 못하게 호적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이름을 짓는 것은 개인의 권한이지만 그 이름이 쓰이는 것은 사회이므로 어려운 글자를 제한하는 것은 공공복리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안그래도 요즘 사회 일각에서는 부르기 쉬운 한글 이름짓기가 한창 번지고 있는 터에 옥편에도 안나오는 까다로운 한자로 이름을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행정으로 규제하는 것은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통념상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권장사항 정도로 그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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