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돌 맞아 짚어본 「선언」 정신과 과제(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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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과감한 개혁만이 「6ㆍ29」 뜻 계승/국민소리 수렴한 민주적 결단은 평가/정치불신 큰 문제… 무분별한 욕구 분출 자제를/내각제 거론 실망… 기득권 지킬 승부수
□참석자
고영복교수<서울대ㆍ사회학> 김호진교수<고려대ㆍ정치학>
▲고영복교수(서울대)=6ㆍ29선언은 우리 정치사를 변혁시킨 역사적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집권세력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의 선택에 따르겠다고 한점이나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정권의 창출을 보장하며 민주화의 길을 명시한 것등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김호진교수(고려대)=6ㆍ29선언은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3년전 당시의 국민들은 6ㆍ10민중항쟁을 통한 명예혁명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요.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그동안 집권세력의 정치행태를 보면 대권장악을 위해 고도로 계산된 승부수였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교수=정치권력이 권위주의의 타성을 벗어던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권층이 이렇게도 변신할 수 있는가 의아심이 날 정도의 선언이었으며 지내놓고 보면 그것이 결코 정치적 제스처로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개의 얼굴 가져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문제해결을 시도해야 한다는 기본노선을 확인했고 어느정도 그같은 입장에서 지금까지 끌어왔다는 점이나 당시 극도의 혼란속에서 혁명이 아닌 개혁의 길로 나아가게끔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측면에서 인정하고 평가해야 할 것은 해야하지 않을까요.
▲김교수=체제내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의 수습이고 개혁의지의 표출이었다고 자기미화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체제외 세력,즉 야당이나 일반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민주화의 본질적 요구가 좌절되는 길목이었습니다. 물론 문맥에 나타난 선언의 정신을 계속해서 살려왔다면 민주화의 결단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각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고 개혁의지가 퇴색되는 요즈음 6ㆍ29는 집권세력의 기회주의적 편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ㆍ29는 선언내용 또는 당시의 상황논리보다 지금의 결과로 평가해야 합니다.
▲고교수=체제내외를 넘어서는 제3자적 시각,즉 역사의 진로,민족적 요구,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볼 수도 있지요. 우리의 정치풍토에서 볼 수 없었던 권위주의의 청산,민주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그 실천을 약속했으며 우리 국민은 두고두고 책임을 묻고 나무라며 약속이행을 재촉할 수 있는 구실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빛 바랜 개혁의지
▲김교수=6ㆍ29는 6월항쟁을 선언적으로는 수용했지만 실천적으로는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구성이 있다는 겁니다. 6ㆍ29가 없었다면 6월항쟁은 본질적인 문민화의 혁명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6ㆍ29는 한국민주화의 걸림돌이었다고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고교수=역사적으로 보면 혁명을 했다고 해서 그 사회적 전통이나 구조적 타성이 일시에 변혁되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시 「혁명」이 이루어졌더라도 외피는 더 나아졌을는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시행착오나 내부적 진통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교수=그러나 6ㆍ29가 없었더라면 4ㆍ19학생혁명이 보여주듯 소위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만족할 만하게 변화하면서 실질적인 문민화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고교수=당시의 여러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정치변혁에 대한 요구도 강했지만 경제적 안정을 해치는 어떤 형태의 혁명도 원치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6ㆍ29는 국민들의 그런 바람대로 군부세력이 정치일선에서 후퇴하는 길을 열어주고 성숙된 민주화를 쟁취하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킨 계기였다고 볼 수 있으며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크게 보면 한국사회에 실보다 득을 많이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장기집권 안될말
▲김교수=그러나 선언작성의 구체적 경위만 보더라도 6ㆍ29자체가 그런 경륜속에서 한국사회의 장래를 생각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권력의 본성에 비추어보면 역시 집권세력의 생존본능에서 나온 상황순응적 임기응변이었다고 하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고교수=물론 6ㆍ29가 6공의 집권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작전상의 방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죠. 더구나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집권세력이 복안으로 갖고 있던 내각제개헌을 다시 끄집어내고 혁신ㆍ재야세력에 대한 직ㆍ간접적인 정치적 탄압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볼때 6ㆍ29의 정신이 오늘날에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김교수=6ㆍ29당시 노태우대통령은 자신의 희망에 우선해 국민의 뜻인 대통령직선제를 하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제개헌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자기기만ㆍ자기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의 제도적 모순에 대한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식의 지역감정 타파ㆍ국민화합이란 교묘한 논리를 대며 내각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또한번의 6ㆍ29식 정략적 승부수라고나 할까요.
▲고교수=3당통합의 배경을 보거나 권력안배등 통합후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내각제가 유리하다는 차원에서 집권당이 거론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집권세력의 편의에 따라 정치적 조작등으로 국민의 의식이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오만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3당통합이후 정치적인 과신에서 오는 잘못된 계산이겠지만 민의에 무조건 굴복하겠다던 6ㆍ29정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태도입니다.
▲김교수=6월항쟁은 장기집권에 반대한다는 것이고 6ㆍ29의 핵심은 바로 장기집권을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각제개헌은 그러나 장기집권을 위한 발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고교수=정치하는 사람치고 영구집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웃음). 문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타성,6ㆍ29가 버리겠다던 바로 그 권위주의적 편의주의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점입니다.
▲김교수=6ㆍ29는 정치ㆍ경제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구속자의 수,공직자 부정,정치부재,정부ㆍ여당의 독주및 지방ㆍ교육자치실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때 5공으로의 회귀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는 형식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의 교체가 없었으며 소극적인 상황적응형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대통령의 지도력 부족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교수=정치적 권력을 밑으로 대폭 양보하겠다는 것이 6ㆍ29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각계의 욕구가 일시에 분출한 뒤 그 수용에 대한 정치권의 자신감이 없어진 탓인지 교육계만 보더라도 6ㆍ29정신이 갖고있는 좋은 뜻이 중단ㆍ지연ㆍ변형돼 가면서 문제점을 보이고 있죠. 물론 언론계등 많은 분야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도 있지요.
▲김교수=6월항쟁이후 각계의 무분별한 욕구분출이 민주화의 진행에 어려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민주주의란 집권세력의 권위주의적 지향성과 일반국민의 자유주의 지향성이 절묘한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점진적으로 추구하는 성숙된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집권세력도 기득권유지에 집착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제몫을 주장하기에 앞서 각자가 자기책임에 충실하는 금욕적 책임윤리가 강조돼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교수=사회적 윤리라는 것도 정치권의 결정에 믿고 맡겨도 좋다는 국민적 합의가 선행될 때 가능한 것 아닐까요. 정치권이 일시에 분출한 욕구를 총체적으로 흡수해 적정수준으로 타협ㆍ조정해주지 못한 데서 국민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쌓여가고 저마다 제 목소리를 높이는 측면이 있지요.
○점진적 추구 필요
▲김교수=그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는 집권세력이 올바른 정책방향을 제시,좋은 풍토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6ㆍ29정신으로 돌아가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ㆍ안기부법ㆍ노동관계법 등 개혁입법의 작업에 정부ㆍ여당은 더이상 머뭇거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고교수=결론적으로 6ㆍ29선언은 정치를 사회적 요구에 부응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해줄 수 있으나 그이후의 정치행태로 볼 때 아직도 그 정신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정리: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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