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잃지 마셔요” (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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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빚 20만원에 집 날리게된 한씨 부부에/익명의 독자 푼푼이 모은 백만원 “선뜻”
20일 오후10시쯤 허륨한 점퍼 차림에 비닐백과 신문 한장을 든 30대 남자가 중앙일보 편집국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왔다.
김포에 사는 독자라고만 밝힌 이 방문객은 6월18일자 중앙일보 18면에 보도된 빚 20만원을 못갚아 악질 채권업자에게 3천만원짜리 집을 빼앗기게 된 한영자씨(39ㆍ여ㆍ부천시 심곡동 중앙연립 102호)에게 『성금을 전하고 싶은데 어디에 내면 되느냐』고 물었다.
『6년동안 월세방에 살면서 아기까지 낳지않고 억척같이 일해 마련한 집을 억울하게 빼앗긴 한씨부부에게 조그마한 용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비닐백에서 꺼낸,한쪽귀가 찢겨나간 편지봉투에는 1만원권 지폐 1백만원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했다.
『이렇게 큰돈을 성금으로 선뜻 내놓은 이유나 알자』며 옷소매를 잡는 당직기자의 몇번에 걸친 간청으로 다시 의자에 앉은 방문객은 주저끝에 마지못한듯 말문을 열였다.
『성은 이씨지만 이름은 절대 밝힐수 없다』며 『우리가족도 단칸셋방을 13년동안 전전한 끝에 88년 겨우 집을 마련한 어려움을 겪어본 팃에 신문을 보자 한씨부부에게 자그마한 용기나마 주고싶었다』고 말했다.
『형제들의 결혼까지도 미뤄가며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수 없었다』는 이씨는 『우리의 기쁨이 컸던만큼 집을 잃게된 한씨부부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씨가족은 18일 밤 한씨부부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펼쳐놓고 가족회의를 열었다.
『아직 넉넉한 상황은 아니지만 돈은 필요한 곳에 꼭 써야한다』고 뜻을모은 가족들은 급한대로 이번 가을에 치를 이씨 여동생의 결혼자금으로 그동안 모아둔 1백만원을 성금으로 내놓기로 했다.
이씨 가족 4명이 모두 일터로 나가 한달에 벌어들이는 돈을 1백만원 가량. 따라서 생활비에 쪼개랴,저축하랴 빠듯한 형편에서 1백만원은 큰 돈이지만 이씨는 『이 성금이 한씨부부에게 희망과 사랑을 찾아줄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값지게 쓰여지는 것이라 우리 가족들은 믿는다』고 말했다.
모친(70)ㆍ남동생(30)ㆍ여동생(26) 등 네식구가 함께 산다는 이씨가족은 75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집을 잃었다.
『주인과 함께 쓰는 부엌,줄을 서야하는 공중화장실….
네식구가 비좁은 방한칸에서 부대껴야한다는 자체가 고통일만큼 힘들었다』는 이씨.
『우선 집부터 장만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형제들이 공장에서,모친은 가내수공업 하청공장에서 억척스레 일한 끝에 13년동안 모은 1천5백만원으로 88년 김포에 조그마한 집을 샀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러나 『이씨가족의 이런 바람과는 달리 한씨부부가 20만원의 빚을 갚지못해 합법적으로(?) 빼앗긴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되찾기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많다』는 설명에 이씨는 잠시 실망의 빚을 떠올렸다.
『채권자에게 남은 빚을 갚아 취하서가 첨부된 「청구이의소」를 법원에 내야하고 이미 강제경매에서 집을 경락받은 사람에게 경락포기를 허락받아야 한다』는 설명에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하는지 몰랐다』고 했다.
이씨는 『하지만 법 이전에 한씨부부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채권자 등 주변사람들이 먼저 사랑을 베풀어 한씨부부가 꼭 집을 찾을수 있도록 기도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나서는 이씨에게 『익명의 성금기탁자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남기기위해 뒷모습이라도 사진을 찍고 싶다』고 용청하자 이씨는 『가족회의에서 모든것을 익명에 부치기로 해 응할수 없다』며 『대신 되찾은 보금자리를 배경으로 한씨부부가 환히 웃는 사진을 신문에서 볼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이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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