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할머니들 태권도 "얏"|홍은1동 「홍일회」회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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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할미들이 태권도 한다니까 우습지. 그래 5년 전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도 겨우 걸었으니까. 이제는 돌려차기·올려차기 못하는 게 없다구. 한번 해 볼티어.』
한가닥 검은머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백발에 깊숙히 얼굴 가득 팬 주름살과 두꺼운 돋보기.
흰 도복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고희의 노령이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쥔 기본자세에는 어느 한곳 빈틈이 없고 기가 넘치는 눈빛과 기합은 상대를 제압한다.
매일 한시간씩 동네 태권도장을 찾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서울 홍은1동 할머니 모임인 홍은회 회원 20여명.
회원 중 5명이 국기원에서 정식으로 공인 초단을 땄고 나머지도 대부분 푸른 띠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
할아버지도 힘든 태권도를 하물며 할머니들이 처음 시작한 것은 85년부터.
당시 홍제·홍은동 일대노인들을 위해 홍제국교에 설치된 노인학교에 다니며 취미·교양강좌 등을 듣던 할머니 몇몇이 인근에 새로 생긴 스타체육관 태권도장에 손자들을 데려다 주면서 흥미를 느꼈다.
『손자 놈들이 기합을 내지르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스러운지….이 나이에 내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괜시리 몸이 들썩이잖아. 농담삼아 이 할미들도 해볼 수 있겠느냐니까 관장님이 무료로 가르쳐주겠대.』 홍은회 회장 최대임할머니(70)의 실명.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고령에다 갑자기 운동을 한 탓으로 몇일만에 몸져눕는 사람이 나오는 등 모임이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도장을 갔는데 글쎄 관장님이 새하얀 도복 스무 벌을 자비로 사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뭐야. 도복을 입으니 훨훨 날아갈 것 같고 이대로 그만둘 수 없다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치솟는 거야.』
7O대가 대부분이었던 할머니들 중에는 늙은이가 별 주착 다 부린다라는 말을 들을까 봐 체육관에 갈 때마다 도복을 보따리에 싸서 가족 몰래 집을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체육관에 다니면서 날로 밝아지고 건강해지는 할머니들의 얼굴에 가족들이 더욱 열성이어서 체육관에 갈 시간이 되면 며느리가 으레 도복을 챙겨놓기까지 하게 됐다.
〈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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