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길없는 길 - 내 마음의 왕국(6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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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최인호 이우범 화
마실을 모르는 뜨거운 낮술은 나를 취하게 하였고, 텅 빈 왕릉을 내리쬐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은 나를 광기로 몰아넣었다. 나는 들고 간 술을 한꺼번에 마시고 그 곳 무덤 앞에서 잠이 들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그 잠 속에서 나는 꿈까지 꾸었었다. 꿈속에서 어둠 속을 달려가는 기차와 차창을 스쳐 가는 설원이 보였다. 철로 위를 달려가는 기적소리와 일정하게 흔들리는 마찰음,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광활한 대지, 흐린 불빛아래 잠들어 있는 승객들의 모습. 그 사이에 비현실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상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머리에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방갓을 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도망치고 있다. 살기 위해 도망치고 있다 이때 덜컹 객차의 문이 열린다. 귀를 찢는 호루라기와 함께 총과 칼을 든 헌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흐림 불빛아래 잠들어 있는 승객들을 헤치면서 상복 입은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다. 레일 위를 구르는 기차의 기관음은 귀를 찢듯이 높아가고, 마침내 헌병은 허리에 찬 칼을 빼어 상복을 입은 사람의 가슴을 내리꽂는다. 비명소리, 외마디 소리, 콸콸콸콸 내리쏟는 선혈.
내 잠은 누군가에 의해 깨어지고 있었다. 얼핏 눈을 뜨자 낯선 사람이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나는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술에 취해 아마도 석인(석인)들 발 아래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한낮의 태양빛은 석인들의 그림자로 가리워지고, 돌에서 풍겨오는 싸늘한 냉기 덕으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잠을 자면 어떻게 합니까.』
아마도 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는 나를 할 일없이 배회하는 젊은 부랑인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갈 곳이 없어 왕릉에 입장권을 사고 들어와 낮술을 퍼마시고 엉망으로 취해 바람에 날아다니는 신문지 한 장으로 한낮의 태양빛을 가리고서 잠들어 있는 거렁뱅이쯤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왕릉 위에서 잠들어 있었던 내가 만약 그가 밤낮으로 지키는 이 왕릉 속에 묻혀 있는 고종황제의 실제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나는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벌덕 몸을 일으켜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나서 그 묘지기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었다.
『이 왕릉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은 나의 할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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