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의 요체(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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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을 망치는 것에 여러가지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사리사욕을 좇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사리사욕에 사로 잡히면 억센 기상이 꺾이고 명민하던 지혜도 흐려지고 결백하던 마음도 더러워진다. 남에 대한 은혜도 모르고 냉혹하게 되어 그 평생의 인품을 깨뜨리고 만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자고로 사리를 탐하지 않았다.』
유교에서 선비(사)의 대명사는 바로 청빈이었다. 가난을 부끄러워 하기보다 오히려 영예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선비정신을 하나의 정치철학으로 승화시키고자한게 조선조의 개화의지였고 이른바 청백리사상은 그래서 조선시대 초기에 찬란한 꽃을 피웠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모두 1백10명이었다. 그러나 태조때 45인,중종때 37인,인조때 28인으로 대부분 전반기에 나왔을 뿐 경종이후에는 그나마 선정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선정기준에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초기의 개혁의지가 그만큼 식었던 것으로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깨끗한 마음,깨끗한 행동,깨끗한 생활로 일관한 청백리들은 두고두고 후대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눈앞에 부닥친 조그만 사욕때문에 청백리의 정반대인 「탐관오리」가 되어 자신은 물론 가문까지 욕되게 한 사람도 적지 않다.
탐관오리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그 생태나 수법이 예나 이제나 별반 다른 데가 없다.
탐관오리전에 등장하는 인조때 사헌부의 한 벼슬아치의 경우를 보자.
그는 백금 30량을 받고 죄인을 놓아 주었다. 그는 자신도 도망을 쳤다가 결국 붙들려 갖은 문초를 받은끝에 큰 병을 얻었다. 일생동안 편안히 먹고 살려던 백금은 자신의 병을 고치는데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조그만 탐욕이 명예는 물론 몸까지 망친 좋은 예다.
정부는 공직자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대통령특명의 사정반을 설치했다. 이같은 방침은 오늘의 국가적인 난국이 사회의 여러요인에 기인하지만 특히 공무원들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위정의 요체는 공정과 청백이요,성가의 방도는 검약과 근면』이라고 한 경행록의 가르침은 오늘도 결코 퇴색하지 않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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