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치료 지원 등 100개 사업 차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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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값을 올리지 않으면 내년부터 건강정책에 큰 차질이 생긴다."(보건복지부 관계자)

"흡연자들이 봉이냐."(23년 째 담배를 피우는 김모씨.45)

정부가 담뱃값 인상을 또 추진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올해 안에 담뱃값을 500원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담뱃값으로 충당하는 건강증진기금을 사용하는 100여 개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암 환자 치료비 지원을 포함한 장밋빛 청사진의 재원 마련 방안도 다시 짜야 한다. 돈 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데, 돈 쓸 일만 잔뜩 벌여 놓은 결과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정부의 이런 태도가 마땅치 않다. 겉으로는 금연을 내세우지만 담뱃값을 올리려는 진짜 이유는 건강보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2500원짜리 담배 한 갑을 사면 이 중 1565원(63%)은 정부 수입이 된다. 정경수 한국담배소비자보호협회장은 "담뱃값을 안 올리면 다른 부담금을 인상해야 된다며 국민을 협박하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 사업 차질 불가피=정부는 올해 담뱃값 인상으로 생기는 수입의 41%인 2287억원을 건강증진기금으로 끌어다 쓸 예정이었다. 이 돈이 안 들어오면 애초에 세운 기금 수입안의 11%에 구멍이 생긴다.

가장 큰 타격을 보는 것은 건강보험이다. 담뱃값 인상만 믿고 보장을 확대하는 바람에 올해 1800억원의 적자가 불가피하다. 보험료를 올리자는 얘기가 다시 나올 수밖에 없다. 소득 기준 하위 50% 계층까지 무료 암 검진을 하겠다던 계획도 차질이 예상된다. 담뱃값 인상을 전제로 암 검진 사업비는 이미 지난해보다 42억원 많게 책정한 상태다.

문제는 올해뿐이 아니다.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은 지난달 "내년 예산도 담뱃값이 오르는 것을 전제로 짰다"고 말했다. 내년 7월 실시하기로 한 만 6세 이하 아동에 대한 무료 예방접종 재원 500억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진다. 2015년까지 암 환자 치료비의 80%를 건강보험에서 부담하겠다는 계획도 수정해야 할 판이다. 정부는 이 일에 필요한 3조9000억원 중 2조원을 건강증진기금으로 쓸 예정이었다.

◆ 다급한 정부=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14일 민주당 김효석 원내대표를 만나기 위해 국회로 찾아갔다. 유 장관은 "담뱃값 인상이 안 되면 여러 사업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김 의원은 이에 대해 "건강보험 재정을 메우기 위해 담뱃값을 올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장관이 의원들을 찾아다닐 정도로 정부는 다급하지만 국회의 반응은 냉담하다. 보건복지위는 국정감사 이후인 11월 2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는 방침만 정한 상태다. 여당의 정책위원회조차 '상임위에서 우선 해결할 문제'라는 입장이다. 한나라당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은 최근 "애초부터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며 "담뱃값 인상에 반대한다"고 성명을 냈다.

담뱃값 인상은 '표'를 얻는 데 썩 유용한 수단이 아니다. 비흡연자는 오르든 내리든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고, 흡연자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게다가 가격 인상과 흡연율 감소의 인과 관계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상당수 흡연자는 담뱃값이 올라도 계속 사 피울 것으로 예상돼 결국 서민층 흡연자들의 부담만 가중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성균관대 안종범(경제학) 교수는 "국회에서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사안인데 정부가 무턱대고 씀씀이를 늘렸다"며 "정부가 얼마나 무계획하고 무책임하게 살림을 꾸려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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