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서도 반발 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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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물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 용의자를 발가벗기고 모욕을 주며 신문하기…. 독재정권이나 자행할 법한 이런 잔혹한 고문을 합법화하는 내용의 '테러용의자 신문법'의 입법이 미국 백악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외국인 테러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는 데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상의 고문 합법화'는 미국의 이미지를 더럽히고 역효과만 낼 뿐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다.

◆ 파월, 침묵을 깨고 부시 비판=부시 행정부 1기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이 19일 이 법안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반대 여론에 불을 붙였다. 파월 전 장관은 이날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연설하며 "이 법안은 미국의 도덕적 기반에 대한 의구심만 더 키울 것"이라며 "만일 북한이 제네바 협정의 '잔혹 행위 금지' 규정을 사문화하려 들면 누가 가만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자신이 혐오한다고 밝혀온 북한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꼬집은 것이다.

파월은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1년8개월 동안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 왔다. 이 때문에 이날의 비판은 큰 무게가 실린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평가했다.

◆ 반대 여론 확산=20일에는 워싱턴 포스트가 법안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으면서 미 언론으로는 처음 법안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실수에 의한 고문'이란 제목의 이 사설은 "가혹한 신문은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뿐 아니라 미국의 명예와 영향력에도 악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이 법안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다. 공화당 보수파 핵심의 하나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존 워너 군사위원장, 린지 그레이엄,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조차 부시의 방침에 반기를 들며 14일 원안을 크게 완화한 대체 법안을 내놓았다.

테러와의 전쟁과 안보를 이슈로 중간선거를 치르려던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지도부로서는 의외의 도전에 봉착한 셈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법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국을 위태롭게 만드는 자들"이라며 강행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옛 부하 파월에 대해서도 "잘못된 이론을 펴고 있다"고 비난, 갈등이 날로 확산하고 있다.

◆ 제네바 협정 대체 시도=백악관의 법안은 포로들에게 잔혹 행위를 금지하고 인간적 대우를 규정한 제네바협정 3조를 지난해 미국이 제정한 '수감자 대우법(DTA)'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이 법안은 '양심에 충격을 주는 행위'만 금지한다. 따라서 중앙정보국(CIA)이 지금까지 외국인 테러용의자들에게 가한 잔인한 신문 기법을 사실상 합법화한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이 법안이 합법화하려는 CIA 신문 기법에는 ▶추위에 떨게 하기 ▶발가벗겨 모욕감 주기 ▶잠 안 재우기는 물론 널빤지에 묶어 익사하지 않을 정도로 물속에 처박는 고문도 포함돼 있다.

CIA는 "테러범들로부터 다음 공격 목표를 알아내려면 우리도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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