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문제는 부모였구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나이가 들면 느는 게 몇 개 있다네요. 그중 하나가 자녀 문제에 대한 걱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이야 낳는 것부터가 선택의 문제라지만 낳은 뒤에도 그냥 자라는 건 아니잖습니까. 학교 가는 문제부터 직장 잡고, 결혼하고…. 일단 결혼한 뒤에는 '책임 끝'이라고 스스로 치부한다 쳐도 그 앞의 선택만도 버거운 일입니다. 어떤 게 나은 길인지 이 말 들으면 이런 것 같고, 저 말 들으면 또 그런 것 같고. 줏대 없음에 스스로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삶의 많은 부분이 그런 선택의 조합 아니겠어요. 이럴 때 가끔 잣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직업상 여러 통계나 여론 조사를 보곤 합니다. 대부분 스쳐 지나가지만, 가끔은 '어, 정말 이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 제일기획이 25~34세의 미혼 남녀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발표한 '디지털 시대의 웨딩 트렌드 심층 분석'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신문에서 보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몇 가지 통계를 들어볼까요. 보도의 초점이 주로 '결혼은 일종의 투자(62.1%)'고 '노후 준비의 시작(84.4%)'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었습니다만, 제게 좀 더 강하게 다가온 건 주변적 얘기였습니다. 예컨대 '결혼한다면 어른들에게 맡기기보다 직접 챙기겠다(90.8%)' '혼수는 되도록 최소화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88.4%)' '요즘 혼수로는 청약통장이나 주식, 보험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87.8%)' '요즘은 결혼 생활에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90.6%)'.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까지는 아이는 낳지 않겠다(65.5%)' 같은 약간 '껄끄러운(?)' 대답도 있었지만 제가 가진 첫 느낌은 오히려 젊은 세대의 '제 주장'에 담긴 자립심이랄까, 건전함이었습니다.

사실 요즘 결혼 문화를 보면서 가장 걱정한 것이, 제가 보기엔 쓸데없는 일종의 '지출 경쟁'이었거든요. 부모 마음이 비슷해 왜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마는 그 말 많고 탈 많은 혼수에, 수천만원씩 들어가는 결혼식을 보면서 '이게 잘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더라고요.

다른 통계 하나 들어보지요. 소보원이 3년 전 신혼부부 418쌍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입니다만 40%가 예물.예단 때문에 배우자(시부모가 아닙니다!)와 갈등을 겪었고, 부모까지 포함해 조사한 결과에서는 96%가 우리 결혼 관행에 문제가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체면문화, 과시 풍조가 문제라고요. 하지만 그 체면, 그 과시를 누가 했을까요. 몇 년에 한 번 입을 예단 옷 빼입고 그 턱없는 음식 먹으면서 부조금 셈하는 마음이 과연 꼭 자녀들의 바람이었을까요.

물론 요즘 아이들의 심각한 의존심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황당한 통계 하나 들어보지요. 2003년 여성가족부가 낸 '한국 가족조사 및 한국가족 보고서'에 10~19세 청소년 148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부모의 경제적 책임이 어디까지냐는 항목이 있습니다. 교육비야 말할 것도 없고 결혼 준비 비용 83.5(남)-87.5%(여), 집이나 전세 마련도 74.0(남)-71.7%(여)가 부모가 전적으로 또는 일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남녀 공히 25% 남짓은 결혼한 자녀의 생활비도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네요. 하지만 저는 이런 황당한 의식 형성 또한 과보호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 부모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통계들을 보면서 요즘 부모들도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소년기의 의존심리가 결국은 '과보호' 때문이라는 것, 사회 현실과 마주한 젊은 세대의 현실적 결혼관을 뭉개는 건 '과시욕'이란 것,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요즘 세상살이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면서 애들은 맹목적으로 싸고도는 거, 그게 과연 의무고 미덕일까요. 혹시 그런 태도엔 은연중 자기 현시라는 삿된 마음이 낀 건 아닐까요.

아마도 청첩장이 제일 많이 날아들 가을, 우리 결혼 문화-절대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편 가르자는 것이 아닙니다-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네요.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