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첫목판본소설 「기재기리」 햇빛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본 소설인『기재기리』가 발굴돼 학계에 소개됐다.
1553년7월18일 간행된 『기재기리』는 기재 신광한이 지은 4편의 소설 「안빙몽유녹」「서재야회녹」「최생우진기」「하생기우전」을 한데 모은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면서도 필자가 출간을 꺼려 1653년에 가서야 일본에서 간행된 김시습의 『금오신화』보다 꼭 1백년이 앞선 것이다.
신광한(1484∼1555년)은 신숙주의 손자로 조선조 성종∼명종때 이조판서·좌찬성·우찬성등 현직을 두루 거쳤다. 24권10책으로 구성된 문집 『기재집』을 통해 시1천5백여수, 부 25편, 가사 20여편을 남겼다. 그러나 『기재집』에는 실리지 않고 별도의 단행본으로 간행된 『기재기리』는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에 간행된 소재영교수(숭실대국문과) 의 『기재기리연구』(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간)에 의해 학계에 상세히 알려지게 됐다.
86년 일본천리대 소장 금서룡·문고본에서 필사본으로 된 이 책을 처음 발굴한 소교수는 국내에도 이 책이 있을것으로 추정, 이번에 고려대도서관소장 만송문고에서 목판본을 발굴, 『기재기리』영인과 함께 연구를 곁들여 학계에 전하게 된것이다.
『기재기리』가운데 「안빙몽유녹」은 꽃을 의인화한 작품으로 주인공 안빙이 꿈에 나비의 인도를 받아 꽃밭에 이르고 여왕의 조원전에 초대돼 각종 꽃들과 어울려 시로 흥취를 돋우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기둥 줄거리.
「서재야회녹」은 선비의 필수품인 문방사우를 의인화한 작품이다. 한 서생이 문득 방안의 인기척을 엿듣게 되는데, 거기에는 벼루·먹·종이·붓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선비가 서로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을 땅에 묻어주고 제문을 지어 위로한다는 것이 이 소설이다.
이 두 작품은 꽃·문방사우등을 의인화, 그 가탁된 세계를 통해 작자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 삶의 방식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고려말 성행한 가전체양식의 소설로의 발전과정을 엿볼수 있게 한다.
「최생우진기」는 삼척의 두타동천을 배경으로 최생이 겪은 신선체험을 형상화하고 있고 「하생기우전」은 주인공 하생이 죽은 여인의 영혼과 결혼, 40여년간 같이 살며 행복을 누린다는 염정소설이다.
이 두작품은 주인공의 일생을 다룬 전기류의 양식적 변모과정을 살필수 있게 한다.
이번 『기재기리연구』가 발간됨으로써 16세기에 이미 소설로서만 이루어진 단행본이 간행돼 읽혀졌던 사실이 밝혀졌으며 또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의 분위기를 이어받은 『금오신화』와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사이의 시대적 공백을 메울수 있게 됐다. <이경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