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전은 미국 덕" 자주보다 동맹 강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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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핀란드 ASEM 때 핀란드 의장이 주도해 9.11 희생에 대한 위로 묵념을 가졌다. 미국의 테러 방지 노력을 지지하는 짧은 의식도 가졌다. 저 역시 그냥 참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와 국민의 뜻을 전달했다."

미국 땅을 밟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14일 오전(한국시간) 워싱턴 상공회의소에서 한 오찬 발언에서는 한 달 전 국내에서 "한국 대통령이 미국 하자는 대로 '예, 예' 하길 한국 국민이 바라느냐"(8월 9일)고 한 뉘앙스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노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에서 한.미 관계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오기 전에 양국 관계 역사를 다시 짚어봤다"며 "한국은 미국이 주장하고 실행하자고 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미국의 지원에 의해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을 이뤄낸 모범국가"라고 말했다. 취임 후 다섯 번째로 미국을 찾은 노 대통령의 발언에선 이처럼 '자주' 대신 '동맹'에 무게가 실려 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다. 행보에도 이런 변화가 담겨 있다.

정상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노 대통령은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찾아 헌화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윌리엄 멀로니 예비역 해병중장이 함께했다. 3박4일간의 일정에서는 교민 간담회를 없앴다. 대신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페리 전 국방장관 등 미국 내 오피니언리더들과의 만남 등으로 채웠다. 말하기 외교가 아니라 듣기 외교인 셈이다.

노 대통령의 동맹외교는 일단 미국 측으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부시 대통령과 내 재임 기간이 일치하는데 이 기간 중에 한.미 동맹의 재조정 작업이 합리적인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해 "한.미 동맹이 아주 굳건한 상태에 있다"는 화답을 받았다.

'자주'의 목소리를 낮추고 '동맹'을 강조한 노 대통령의 화법은 무엇을 의미할까.

청와대 관계자들은 외교의 현실성을 거론했다. 한 관계자는 "정상 외교에선 네거티브(부정적)보다 포지티브(긍정적)한 대화를 하는 게 관례"라며 "자주는 자국 국민을 향한 메시지이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했다.

하지만 외교적 수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유럽 순방 중 정상회담 관련 자료를 수시로 챙겼을 만큼 심적 부담을 느껴왔다고 한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은 작전통제권 환수는 보수 진영으로부터, 한.미 FTA 추진은 진보 진영으로부터 공격받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열렸다.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부담이 노 대통령을 전에 없이 신중하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작 중요한 건 방미 이후다. 노 대통령은 2003년 5월 취임 후 첫 방미 때도 "만약 53년 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미 외교가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귀국 후 다른 목소리를 내자 당혹감과 배신감을 토로했다. 한.미 간 신뢰에 혼선이 일고, 금이 간 게 그때부터라고 지적하는 외교관도 많다.

워싱턴=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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