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코드' 인사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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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세기 초 하버드대학을 세계적 대학으로 일으킨 사람이 찰스 엘리어트 총장이다. 무려 40년 가까운 재임 기간 중 엘리어트 총장이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대학정책이 "인브리딩(inbreeding)은 안된다"였다. 인브리딩은 동종.근친교배를 뜻한다.

모교 출신 대학교수 채용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 전통은 지금껏 이어져 하버드대 교수 중 모교 출신은 전체 교수의 10%대에 머물고 있다. 왜 그랬을까. 모교 출신 교수만 임용할 경우 도제식(徒弟式) 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뿐 스승의 이론을 넘어설 수도,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렵다. 스승을 닮은 붕어빵 제자만 양산된다. 연구가 활성화될 리 없다.

*** 下意는 없고 上意만 있는 조직

대학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떤 조직에서나 동종교배 인사는 조직을 병들게 한다. 상사의 눈치 보기만 성행하고, 하의(下意)는 없고 상의(上意)만 지배하는 경직된 조직이 된다. 노무현 정부가 왜 재신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가. 여러 이유 중 인브리딩 인사, 이른바 코드 인사탓이 크다고 본다. 대통령과 호흡을 함께 해온 386 중심의 청와대 인사와 386적 마인드를 지닌 이른바 개혁코드 인사가 파경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결과라고 본다.

386이든 386적이든 이들의 특징은 경험부족이다. 큰 국사를 맡아 주도해본 적이 없다. 물론 젊은 패기, 맑은 정신과 깨끗한 손으로 새 지평을 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 본 386은 그렇게 맑은 것 같지도, 깨끗한 것 같지도 않다. 이미 여러명의 더러운 손이 발각돼 대통령 곁을 떠났다.

그중 핵심 실세라 할 국정상황실장이라는 젊은 피도 정보 독점과 전횡이라는 불명확한 이유로 다른 쪽도 아닌 대통령의 정신적 여당이라는 신당의 공식 항의에 밀려 사표를 냈다. 반독재투쟁을 했던 운동권들이 동가식 서가숙 낭인생활을 하다 한 인권 변호사와 뜻을 함께 하고 어려운 시절 동고동락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연대는 아름답기조차 하다. 386 실세가 사고 치고 물러날 때마다 대통령이 그들을 옹호하고 지켜주는 의리는 야박한 정치풍토에서 신선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자리는 의리에 살고 죽는 의협단체가 아니다. 국민의 생사와 나라 장래가 걸린 국사를 기획.집행하고 분쟁을 조정하며 여러갈래 정책을 통합 조정하는 막강한 조직체다. 이 최고 권력의 조직망을 인브리딩 동종교배 인사로 했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이 정부는 국정상황실을 재편했다. 정보기관의 권력화를 막기 위한 종합정보 보고체계라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자리에 대통령 직계 측근이 앉아 있다면 국정상황이 제대로 파악될 수있을 것인가. 대통령에게 불리한 정보는 왜곡되거나 윗분에게 유리하고 식성에 맞는 정보로 취사선택될 수도 있다. 인브리딩 인사로는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없다. 윗분을 뛰어넘는 창의적 기획이 나올 수 없다. 조직에 불리한 문제라면 쉬쉬하고 덮고 넘어갈 수 있다. 7개월여 국정혼란과 대통령 지지도 하락은 언론이나 야당 탓이 아니라 인브리딩 인사에 따른 자중지란에 있다고 봐야 한다. 재신임 투표를 하든 말든 국정 표류의 진원지는 코드인사에 있다는 자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 실용주의 잣대로 정책 결정해야

이라크 파병은 진보냐 보수냐의 잣대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국익이라는 냉엄한 실용주의적 계산이 존재할 뿐이다. 핵폐기장 설치 여부는 진보냐 보수냐의 선택이 아니라 어디에 짓고 어떻게 주민을 설득하느냐는 현실적 문제다. 나라 교육이 잘못되고 경쟁력이 없다면 어떻게 세계적 반열에 설 경쟁력 체제를 갖추느냐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책을 이념으로 접근하니 나라가 분열하고 정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코드가 맞는 끼리끼리 뭉칠 때 이 또한 이념적 동종교배 조직이 된다. 이런 이념적 결사체는 공성(攻城)에는 맞아도 수성(守城)에는 맞질 않는다. 반독재.반체제에는 맞지만 국정운영에는 무력하다.

왜 유방이 황제에 오른 후 그의 가신을 몰아냈는지, 왜 빌 클린턴의 아칸소 사단이 집권 후 지리멸렬했는지 동서고금의 사례가 입증하고 있다. 재신임 국민투표는 사실상 물건너간 셈이다. 盧대통령은 하루빨리 재신임 정국에 마침표를 찍고 청와대와 내각의 시스템을 쇄신하는 게 급선무다. 실용주의자 노무현의 진면목을 펼쳐 보인 다음 그때 신임을 물어도 늦질 않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