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상속 "출가딸도 18세기까지 균등분배" |실물지정 광산김씨·상산김씨 분재기에 기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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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민족의 재산균등분배 상속 전통은 조선후기까지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은 문화부가 광산김씨「예안파종가소장고문서」(7종4백41점) 및 전적(13종61점), 「상산김씨 동복화회문기」를 각각 보물1018호∼1020호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장·차남 서열구분은 물론 남녀구분도 없고 심지어 출가한 딸에게까지 차별없이 균등분배했던 재산상속전통은 고대부터 이어져 조선초기까지 계속됐었다는 게 그동안의 국사학계 통설이었다.
국사학계 및 가족사회학계, 여성학계 등에서는 이들 보물중 재산상속기록인 분재기부분에서 나타나듯 남녀평 등의 전통이 고대에서부터 조선후기까지 계속됐으나 이시기에 유교적 전통이 뿌리를 내리면서 남녀차별이 나타나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장자상속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남성우위전통이 우리의 생활에 파고듦으로써 전통관습이 붕괴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교수는 『재산균등 분배상속전통이 이번 사료에서 나타났듯 조선후기(영조7년·1731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규명에 의미를 두고싶다』면서 『이와관련된 더 많은 사료가 발굴되면 이 시기의 이같은 전통을 일반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교수는 그러나 당시 양반사회의 이같은 전통은 비교적 재산이 적은 중인·상민계층도 모방하려고 노력했을 것이 분명해 재산상속전통을 통해서도 우리민족의 남녀평등사상을 확인할수 있다』고 덧붙였다.
가족사회학을 전공하는 고려대 최재석교수(사회학과)는 『이번의 분재기에서 다시 확인되듯 우리민족의 남녀평등사상이 재산상속은 물론 사회제분야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인식, 남성우위적인 우리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교수는 또 이들 문건의 보물지정이 사회제도는 물론 정치·경제제도등 모든 분야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의 남성우위시각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돼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상산김씨가의 「동복화회문기」는 양친별세후 삼남매의 균등한 재산분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출가한 둘째(주낭한건의 처)는 분재기에 성별순이 아닌 나이순으로 두번째 기입돼 선친소유토지와 노비를 남자형제들과 균등하게 상속받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은 전통은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16세기중엽(1542년께) 자신의 친정어머니로부터 출가한 네자매와 함께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받았던데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신사임당은 자식인 이이 몫으로 친정어머니 제사를 모시는 재산몫(봉사조)인 기와집 한채, 노비 5명과 논20마지기를 받아 율곡이 외조모의 제사까지 모시는 남녀평등의 흔적이 우리역사에 나타나고 있기까지 하다.
또 광산김씨 일가의 문서에 따르면 종손이 사망한뒤 큰아들이 아닌 망자의 아내가 재산행사권자(재주)로 행세하는 것도 특색중 하나.
한 예로 1528년 이종업의 처 오씨는 재주가 되어 후손들에게 노비·전답을 균등하게 분배해주고 있는데 광산김씨가 문서47건중 21건이 여성이 재주로 재산권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과정에서 재주는 문서말미에 서명후 묵인을 하고 재산수령자 역시 서명후 수결(사인)을 하고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문건등의 실사와 분석·고증을 맡았던 문화재관리국 최정희문화재전문위원(56·여)은 『지금까지 발견된 분재기중 광산김씨가 것이 가장 최근의 것』이라며『이들 문건들이 우리민족의 남녀평등 사상의 전통을 구명하는데 사료로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우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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