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미안해 산양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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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첫번째 등반지는 설악산의 형제봉 릿지(암릉)였다. 8월 염천이 맹렬하기는 했어도, 형제봉에 닿기 전 중도에 내려온 것은 단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걸 본 것은 4피치(암벽 등반 시 40~50m 정도의 마디)를 막 넘었을 때였다. 앞서 가던 일행 한 분이 바위턱를 올라채더니 대뜸 말했다. "어! 산양똥이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그 느낌은 뭐였을까? 반가움과 함께 머릿속을 덮친 것은 아마도 두려움이었을지 모르겠다. "밟지 마세요, 그대로 두세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부랴부랴 따라 올라가서 보았다. 바위벽을 등지고 앞으로 낭떠러지를 이룬 바위턱 위의 까맣고 동글동글한 산양똥. 박그림씨의 홈페이지(www.sanyang.net)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바싹 말라있는 산양똥을 보면서 여기서 가끔씩 쉬어갔을 산양이 오지 않은지가 꽤 되었을 거라 짐작했다. 이 길을 개척한 것이 지난 7월이라 했으니 산양이 사라진 것은 그때쯤 아닐까?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서 쫓겨난 산양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마음이 아려왔다. 여기는 사람의 길이 아니다. 여기는 산양의 길이다. 이 길을 우리에게 추천한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은 여기가 산양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일에는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된 멸종위기의 산양을 보호하는 일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산양을 알게 된 것은 박그림씨의 홈페이지를 통해서였다. 그는 설악산 산양과 희귀동물의 흔적을 찾아 일년에 반을 산에서 보내며 설악산 생태계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본래 산꾼이던 그가 설악산에 들어가 그 일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었다. 설악산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외국인 현장조사단 안내를 맡았다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 했다. 한 외국인이 말했다. "풍광은 아름답지만 어떻게 동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느냐. 동물이 없는 산은 죽은 산이다." 결국 설악산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세계자연유산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문화재관리국에서 68년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지정할 때만 해도 1000여 마리에 이르던 산양은 이제 100여 마리도 남지 않았다. 멸종 위기다. 박그림씨는 말한다. 설악산을 계단 삼아 히말라야나 알프스를 오른 산악인들이 몸져 누워 있는 설악산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그의 간절한 질문은 설악산 바위길에 매혹되어 버린 나에게로도 향해 있다. 그의 글과 사진 속에서 발견한 것은 내가 알지 못했던 상처받은 설악산, 결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슬픈 사실이었다. 그는 산양과 설악산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또한 행하는 사람이다. 그의 글들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외로운 일인지를 말이다.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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