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생긴 흰머리카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영어학교를 가기위해 머리를 손질하다가 깜짝 놀랐다. 머리 곳곳에 하얀머리카락이 하나씩 삐쳐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제 이웃집 주영엄마가 흰머리카락을 두개나 집어준 것이 우연이 아니었구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34세에 벌써 흰 머리카락이라니, 아직 흰머리카락이 돋아나올 나이가 아닌데…. 몇개의 흰머리카락을 집어내고는 왠지 마음이 스산해 미국생활을 하면서 다니고 있는 영어학교도 그날은 못가게 됐다.
몇해전 유럽에 살때 두살 위였던 친구의 흰머리카락을 가끔씩 뽑아주던 기억이난다.『얼마줄래』하면서 뽑았던 친구의 흰머리카락은 꽤나 많았다. 숱이 많았던 탓에 그런대로 볼만했던 친구의 머릿결.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어느새 내 머릿결에도 친숙해 할 수 없는 나이테가 자라나고 있다. 두해전에 만났던 작은 오빠의 머릿결도 오늘따라 유난히 생각난다. 그옛날 세살터울인 오빠와 함께 곧잘 어머니 머리맡에 앉아 흰머리카락을 뽑는 경쟁을 벌였다.
서로 돈 몇푼을 더 타려고 종종대던 그 어렸던 남매도 기억속에 사라져 버렸고 이제 마흔을 세해 남겨둔 중년의 남자와 30대 중반의 여자만이 남았다. 그때의 고운 빛깔을 지닌 어머니는 칠순을 네해나 넘긴 할머니가 되였으니 어찌 빠른 세월만을 탓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흰머리카락은 늘고, 작은 기온차이에도 쉽게 감기에 걸리고, 몇 번이고 영어문장을 외워도 돌아서면 잊고, 그저 건망증만 쌓이고, 이래저래 나이값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마음은 젊어 흰머리카락쯤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라고 자위하면서 열심히 살고 싶은 것을. 아이에게는 예쁜엄마로, 남편에게는 귀여운 아내로, 이웃에게는 밝은 모습으로 남고 싶고 나이드신 노모에게는 언제나 천진한 어린아이의 빛깔로 남고 싶은 이 주책없는 마음이 오직 나만의 생각일까.

<1218 Wil1owbrook Dr.#6 Huntsville A1 35802U.S.A.>.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