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동구|열기의 현장을 가다 ―(19) |헝가리 온국민 한목소리 "소 그늘서 벗어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나지임레 특별전시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두나강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15분거리인 무제움(박물관) 가의 국립박물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이 전시실이다.
나지 임레는 외국에서는 통상 임레 나지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에서는 한국등 한자문화권의 성명 표기방식과 마찬가지로 성이 먼저고 이름이 뒤에 온다.
그는 1956년 당서기장에 취임하면서 헝가리의 중립화와 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나지 임레는 56년10월23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주하면서 실각했다.
소련군의 탱크를 앞세운 헝가리침공과 부다페스트 시민의 반소봉기는 수백명이 사망하고 20여만명의 헝가리인이 국외로 망명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나지 임레는 결국 소련군에 체포돼 처형됐었다.
그의 처형후 집권한 카다르의 공산당정권은 최근까지 헝가리에서 나지 임레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 했었다. 그는 반동·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혔었다.
그러나 이제 나지 임레는 헝가리의 영웅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헝가리 개혁이 고비에 이르렀던 지난해10월 수많은 시민들이 신문사들에 편지를 보냈다.
이들 편지는 『이제 헝가리는 나지 임레의 정신을 재평가할 때가 됐다. 그의 독립 자주정신을 헝가리의 어린이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그의 기념관을 세우자』고 역설했다.
헝가리정부는 이에 따라 국립박물관에 그의 특별전시실을 마련,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에게 56년의 비극과 헝가리의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
나지 임레 특별전시실을 지나면 곧바로 나타나는 전시실이 헝가리 건국영웅 성스티븐왕의 왕관전시실이다.
서기 1000년 헝가리 첫왕이었던 스티븐이 대관식 때 사용했던 왕관은 레이저 감시 체계속에 엄숙히 진열돼있다.
스티븐왕은 형가리에 첫 왕국을 건설, 외침을 물리치며 국가를 세우고 기독교를 받아 들였었다.
이처럼 헝가리 최초의 영웅과 최근의 영웅을 기리는 전시실이 바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헝가리의 오늘을 반영하는 한 단적인 예가 되고있다.
취재진을 안내했던 부다페스트 카를 마르크스대 4년생 크리스티나양은 『헝가리 개혁의 원동력은 국민적 자긍심의 회복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헝가리의 자긍심 회복은 먼저 지난 45년간 헝가리를 지배해온 소련의 영향과 스탈리니즘에서의 탈피로 나타나고 있다.
헝가리 개혁세력은 공산당의 전통적 문양인 별과 곡식낟알 대신 15세기 헝가리전성기 시절의 마티아스왕실 문장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0월23일 헝가리가 헝가리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이를 선포했을 때 시민들은 마티아스왕정의 문장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다.
또 시내 곳곳에 있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크고 작은 붉은 별을 걸게 하거나 지우고 있었으며 도르자 교르기가의 레닌동상도 지난해 3월 보수를 이유로 철거한뒤 1년이 가깝도록 복원되지 않고 있다.
헝가리명문 카를 마르크스대학생들은 교명에서 카를 마르크스를 없애고 부다페스트경제대학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다.
두나강변 카를 마르크스대건물 건너편의 언덕에 있는 공원 겔레르트 헤지에는 높이 20m에 가까운 대형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1945년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주하면서 나치군을 몰아낸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헝가리가 세운 대형 기념상이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한 지방대학교수 야노스씨는 『아마도 거기에서 헝가리인들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노스교수는 소련이 헝가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악령을 싫어하듯 싫어하는 말을 대화 중간중간 기회있을 때마다 끼워넣곤 했다.
부다페스트의 월간경제지 기자는 이같은 헝가리의 변화를 「헝가리국가관의 재형성」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유명무실해진 공산당에 한번도 가입한 적이 없다고 말한 이기자는 『헝가리의 정치·경제개혁은 이같은 자기 발견의 새출발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오늘날 헝가리전체는 지식인에서부터 노동자까지, 관리에서 주부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할 정도로 개혁의지에 충만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라고 말했다.
폴란드나 소련 또는 불가리아등 지식인이 개혁 주도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농민들은 개혁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헝가리는 국민전체가 개혁을 향해 고속질주할 수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카를 마르크스대의 차키 차바총장(경제학박사)은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헝가리가 개혁 속도를 늦추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이개혁은 『헝가리의 고유한 독자적 모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김동수 부국장 진창욱 기자 사진 주기중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