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할아버지 김성남씨(마음의 문을 열자: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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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산 무료로 빌려줍니다”/성내역앞에 천여개 자비로 마련/“어려울때 내가 받은 도움 갚는것”
「우산을 무료로 빌려드립니다. 사용후 제자리에 갖다 주십시오」.
서울 잠실4동 성내역 입구엔 검은 글씨의 노란간판이 나지막하게 걸려있었다.
10년째 햄버거장사를 하며 우산을 공짜로 빌려주고 있는 「우산할아버지」 김성남씨(61).
영하의 추운 날씨속에 곱은 손을 입김으로 연방 녹여가며 망가진 우산을 고치기에 여념이 없다.
『81년 성내역 옆 시영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할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전철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햄버거노점 옆 우산 보관함에 우산 1천4백여개를 마련해두고 비 또는 눈이 오는 날이면 누구에게나 빌려준다.
82년부터 무료자전거 보관소도 설치,아침7시부터 밤10시까지 하루 2백∼3백여대의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지켜주고 있다.
또 85년부터 집에서 보리차를 넉넉히 끓여와 음료수로 제공하기도 한다.
『75년 왕십리 달동네에서 강제철거당해 이곳으로 쫓겨왔지요. 당시 저는 헌 옷가지와 양식을 얻어쓰는 등 이웃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처지가 어렵던 옆집 김노인(당시 59세)이 구청에서 구호품으로 받은 밀가루 1부대를 몰래 저희집에 놓고 갔을 때엔 언젠가는 이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눈물을 흘렸죠.』
김씨는 여태껏 이웃들이 보여준 사랑에 비하면 자신의 봉사는 보자리것 없는 것이라고 겸손해 한다.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그는 75년 전남 해남에서 부인 명효순씨(59)와 1남3녀를 데리고 무작정 상경,동두천에서 미군상대 스카프장사를 시작으로 떡볶이장사ㆍ순대장사ㆍ청소원 등을 전전하며 온갖 역경을 헤쳐왔다.
그러다 81년 햄버거장사로 생활이 안정되면서 이들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게 된것.
처음에는 비닐우산을 빌려주다가 너무 쉽게 부서져버려 헝겊우산으로 바꾸었다.
경비 절약을 위해 우산수선법을 직접 배워 고물상에서 부서진 우산을 개당 50∼1백원에 사다 고쳐놓는다. 한달 평균 사들이는 헌우산은 2백∼3백개.
10년전만해도 빌려간 사람의 70%정도가 우산을 돌려주었는데 요즘은 우산에 「봉사용」이라고 크게 써놓았어도 겨우 절반 정도가 반납하고 있는 실정.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한게 아니라 세상이 정신없이 바빠져 깜빡 잊고 오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김씨는 애써 선의로 해석하고 「얌체 세대」를 탓하지 않았다.
4백원짜리 햄버거를 하루 3백여개씩 파는 김씨부부의 한달 평균수익금은 70여만원. 그중 10여만원을 헌우산과 성내역 청소원들에게 매일 나누어 주는 빵ㆍ우유를 사는데 쓰고 있다.
『세딸이 모두 출가해 현재는 군에서 막 제대한 아들녀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우산을 빌려간 분들이 많이 팔아 주셔서 이젠 세 식구 먹고 살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됐죠.』
김씨의 맏사위는 은행원,둘째사위는 트럭운전사,막내사위는 주유소 직원이다.
『재작년엔 우산을 빌려갔던 여승 두분이 「중생에게 값진 보시를 하고 있다」며 박카스 2박스를 약국에 맡겨놓고 갔죠.』
이젠 전철을 타면 자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도 있다며 흐뭇해 했다.
『우산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오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자전거만 홱 집어타고 가는 사람들을 대할때엔 좀 섭섭합디다.』
김씨는 이달말까지 양로원에 우산 20개를 기증키로 했다며 부서진 우산들을 다시 정성스레 고치기 시작했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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