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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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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개는 인간의 친구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고로 개는 정치적 동물이다'.

다소 도발적이지만 이 명제는 참이다. 적어도 한국 정치판에선.

개가 정치 무대에 본격 데뷔한 건 YS 덕분이다. 시작은 점잖았다. 1993년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YS에게 버림받자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고사에 자신을 빗댔다. 제법 당시 식자(識者)들을 감탄케 했던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그것이다. 얼마 뒤 JP마저 YS에게 토사구팽되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토사구팽은 한고조 유방의 일등공신 한신이 유방에게 배신당한 뒤 한 말 '교토사 양구팽(狡兎死 良狗烹)'에서 나왔다.

권좌에서 물러난 YS는 다시 '개싸움'을 벌였다. 이번엔 점잖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99년 2월 YS는 당시 대통령 DJ를 마구 공격했다. 이를 두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이) 주막집 강아지처럼 시끄럽게 해선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YS는 즉각 "그렇게 말한 사람은 골목 강아지냐"며 반박했다. 졸지에 대한민국 국민은 전두환 8년, YS 5년 도합 13년간 강아지의 통치를 받은 셈이 됐다.

개가 이처럼 경멸의 뜻으로 쓰인 건 꽤 오래됐다. '개만도 못한 놈' '개XX'는 욕중지존(辱中至尊)이라 할 만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국 공용어처럼 쓰였다. 고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개를 뜻하는 단어 'kelev'는 '남자 기생'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됐다. 로마인들은 개를 '기생충'과 같이 썼다. 프로이트는 개가 경멸의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을 개 탓으로 돌렸다. 걸핏하면 자기 생식기를 핥아 대는 민망한 행동으로 모욕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스티븐 부디안스키 '개에 대하여')

초.중.말복 다 지난 여름 끝자락, 때아닌 개 논쟁으로 정치판이 뜨겁다. "도둑이 들려니까 개도 안 짖더라"는 대통령의 말이 실마리가 됐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대통령이 진짜 관심을 가질 개는 따로 있다"며 양정철 청와대 비서관을 '손님을 쫓는 사나운 개'에 빗댔다.

'손님을 쫓는 개'는 한비자의 구맹주산(狗猛酒酸:개가 사나우면 술이 쉰다) 고사에서 나왔다. 한비자는 간신이 있으면 어진 선비가 들지 않아 나라가 쇠약해진다고 생각했다. '술집 주인이 아무리 친절하고 술을 맛있게 빚어도, 사나운 개가 손님을 쫓아내면 망하게 마련'이란 것이다.

사납든 점잖든, 개는 개일 뿐이다. 아무리 인간과 친하다지만 개가 자꾸 정치판에 개입하는 건 왠지 볼썽사납다.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