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30. 영동 개발 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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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시범아파트 분양 성공으로 여의도 땅이 팔려 나가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영동지구를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서울시 현안으로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사둔 땅도 거의 팔아버린 1971년 하반기 들어 서울시는 약 1천만평의 영동지구에 투자할 돈이 없었다. 시는 당시 광주대단지 조성. 무허가 건물 철거.수돗물 증산 등에도 투자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시 재정 상태가 나쁘다고 영동지구를 무작정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영동지구 개발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거점개발방식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즉 몇 곳에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버스를 다니게 해 주민 수를 크게 늘리고 강북지역에 사는 이들의 친지들이 찾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시민의 관심이 점차 높아질 것 같았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논현동 체비지 7천여평에 공무원아파트 12개동을 짓기로 했다. 시와 시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무주택 공무원들이 입주할 3백60가구(12.15평형)가 71년 12월 완공됐다. 일부 자금은 무상 지원받고 융자를 끼면 가구당 72만원 정도만 내면 입주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지금의 지하철 3호선 신사역에서 걸어서 6~7분, 시청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였다. 그러나 1천만평의 벌판에 들어선 5층짜리 아파트 12개동은 망망대해에 돌메이 한개 던진 듯했다. 이어 72년 12월 단층주택 단지 열곳을 완공했다. 73년에는 압구정.논현.학.청담동 등에도 모두 열곳의 단독주택단지가 조성됐다. 이때 들어온 사람들이 강남 개척의 선구자인 셈이다. 주택 단지 조성과 함께 서울시는 시내버스 노선을 강제 배정했다.

비로소 시가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들 주택 단지는 이후 증.개축을 거듭해 지금은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렸지만, '3단지 앞' '8단지 앞' 등의 버스정류장 이름은 지금도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세금 감면 조치도 영동지구 개발을 촉진시킨 주요 원인이었다. 영동1, 2구획정리사업지구(약 1천만평)는 73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됐다. 이에 따라 영동지구 내 땅을 매입해 주택 등 건물을 지으면 나중에 그 건물을 팔더라도 부동산투기억제세.부동산매매에 관한 영업세 등의 국세와 토지 및 건물에 대한 등록세.취득세.재산세.도시계획세.면허세 등의 지방세가 면제됐다.

73년 말 5만3천5백54명이었던 영동지구 내 인구 수가 개발촉진지구의 효력이 끝난 78년 말 21만6천7백97명에 달했다. 5년 만에 4배로 늘어났다.

영동지구 개발이 급속히 진행된 배경에는 70년대 서울시정의 최대 과제였던 '강북 인구집중 억제'정책이 있었다. 양택식 시장은 72년 초 "사치.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종로.중.서대문구 등에 바.카바레.나이트클럽.술집(50평 이상).다방.호텔.여관.터키탕 등 각종 유흥시설의 신규 허가는 물론 이전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종로.중구 전역, 용산.마포구 내 시가지 전역, 성북.성동구 내 일부 지역을 포함한 약 8백40만평을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묶어버렸다. 이 같은 강북억제책은 거꾸로 강남개발촉진책이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도시의 기능이 변하기 시작했다. 강북의 바.카바레.술집 등이 가장 발빠르게 강남으로 옮겨갔다. 규제도 없고 세금도 깎아주는 데다 주차도 편리한 신사.압구정.논현동 일대가 화려한 유흥가로 변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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