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기˝ 꺽기위한 속셈|일제 경성부청사 「대한문」맞은편 설치|서울시립대 손정목교수 『향토서울』에 논문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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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조선왕조를 약탈한 일제가 경성부청사(지금의 서울시청)를 덕수궁 대한문 맞은편에 세운 것은 조선민족의 숭왕의식과 독립의지를 꺾기위한 때문이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시립대 손정목교수가 최근 서울시가 발간한 『향토서울』에 기고한 「조선총독부 청사 및 경성부청사 건립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발표됐다.
손교수는 이 논문에서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이 사망하기 전까지 1897년부터 22년동안 거처로 사용된 탓에 한일의정서, 을사조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등 굴욕적인 조약이 차례로 체결될 때마다 대한문앞에서는 수많은 유생·학생들의 연좌·읍소가 계속됐고, 특히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했던 시위가 대한문광장에서 있은 후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들의 숭왕의식과 독립의식의 발원지로 상징되는 이곳의 기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이 폭 넓게 번져 경성부청사를 이곳에 세운 것』이라고 밝혔다.
일제는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 서울행정을 담당하던 한성부를 경기도산하의 경성부로 격하시킨뒤 당시 일본영사관건물(현 충무로신세계백화점부지)을 경성부청사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업무량이 늘어나고 기구가 커지면서 청사를 옮겨야 할 상황에 이르자 1921년 박영효·송병준등 친일귀족을 고문으로 하고 일본인유지들을 회원으로 한 「경성도시계획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신축청사후보지로 4곳을 선정했다.
▲소공동 대관정자리 (현소공동6) ▲남대문소학교자리 (현 남대문로4가45·대한상공회의소 부지) ▲경성일보사자리 (현 대평로1가54·서울시청부지) ▲경성일보사뒤편 국유지 (현 대평로1가31·프레스센터부지)등 대평통 (현 태평로) 주변의 4곳.
이들이 또 대평통 부근을 고집한 것은 명치초기 일본정부가 동경관아 및 주요건물을 배치하면서 적용한 『일본교를 중심으로 길따라 10리 사방에 양식건물을 세운다』는 원칙을 서울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
총독부청사(현 국립중앙박물관)∼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조선은행(현 한국은행)∼경성역(현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주요 현대식건물을 대평통을 따라 배치한 것도 바로 그같은 이유 때문.
이들은 이같은 이유 때문에 당시 경성일보사옥이었던 지금의 서울시청자리를 내부적으로 경성부청사부지로 정해두고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짐짓 남대문소학교 교정으로 잠정 결정했었다.
일제는 이후 몇몇 일간지를 앞세워 『일인들이 많이 사는 남촌목(현 남대문 남쪽)에다 청사를 건립하는 것은 북촌쪽에 사는 조선인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토록 해 마치 여론에 밀려 마지못해 위치를 바꾸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 경성일보사옥을 청사부지로 다시 결정하는 고도의 술책을 사용했다.
손교수는 『남대문소학교를 부지로 잠정결정한 시기인1923년 2월보다 3개월 앞서 22년11월에 이미 동경제대 출신의 일본인 건축사 3명이 경성일보사옥자리를 목표로 청사설계를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도 이같은 사실이 증명된다』고 밝혔다.
일제는 경성부청사를 지은 후 『관청건물중에서는 최초로 공중식당·전화자동교환기를 설치하고 조선인들의 백의에 맞게 흰색의 특수 석재도료를 건물외부재료로 사용했으며 당초 설계높이인 4Om를 35·5m로 조금 낮추는 대신 아랫부분의 폭을 넓혀 위압감을 주지 않도록 했다』고 선전했다.
손교수는 그러나 이같은 선전에 대해 『건설비절약을 위해 장식용 대리석대신 석재도료를 사용했을 뿐이며 3·1운동을 계기로 힘만 가지고는 한민족을 제압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실감해 너무 위압감을 주는 것을 피했을 따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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