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화가」권령유씨|파리생활 청산 고국서 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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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종이 화가」권령우씨(64)에게 있어 90년은 유달리 뜻깊은 해가 될 것 같다. 11년 동안의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다시 고국에서의 작품활동을 시작하는 첫해이기 때문이다.
권씨는 오는 2월 중순에 가질 대규모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연초부터 땀을 흘리고 있다. 그 동안 제작해온 작품을 정리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호암갤러리에서 마련될 권령우 초대전에는 그가 파리생활 중 제작한 작품 가운데 1백여 점을 정리해 발표한다. 대부분이 1백호가 넘는 대작들이다.
이 전시회는 80년을 전후한 시기의 백색작품부터 80년대 중반이후의 채색작품까지 그가 지난 10년 동안 추구해온 작품세계가 집약·정리되는 뜻깊은 전시회다.
『지금까지 늘 어떤 계획이나 목표를 정해놓고 작품을 만들거나 살아온 적은 없습니다.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전시회 뒤엔 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올해는 새로운 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전념해온 그의 조용한 겸손함 뒤엔 새해에 거는 새로운 의욕이 엿보인다.
권씨는 또 오는 5월엔 캐나다 오타와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부터 아틀리에를 새로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난해 귀국해 살고 있는 아파트(안산예술인아파트)주변 상가2층에 20평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지만 주변이 어수선해 도무지 작품에 집중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다.
『올해엔 서울근교에 30평정도의 아틀리에를 마련해 조용히 작품에만 매달리고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씨의 꿈과 일과는 오로지 작품뿐이다.
지난 11년 동안 파리근교 토르시의 예술인 촌에 살면서도 그는 한 지붕 안에 있는 주거공간과 작업실을 시계추처럼「출퇴근」하며 그림에만 매달려왔다.
권씨는 파리화단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미술의 시류에 물들지 않은 독자적인 회화세계로 개인전을 세 차례 열었고 유명한 살롱 드 메전과 그랑 에 죈 오주르디전에 매년 초대돼 출품해왔다.
유럽화단에선 그의 작품을 보고『선의 경지를 느낀다』고 주목해왔다.
권씨는 동양화가이면서도 동양화의 틀과 격식을 벗어나 새로운 추상의 지평을 연「동양화단의 이단자」다.
그는 60년대 중반부터 동양화의 기본 매재인 지·필·묵 중에서 붓과 먹을 버리고 화선지만을 매재로 새로운 조형세계를 창출했다.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고 화선지를 바르고, 긁고, 찢고, 뜯고, 구멍 뚫는「변칙적」작업을 통해 종이자체의 표현가능성을 모색해왔다.
『나무나 칼로 화선지를 찢거나 뚫는 과정은 붓으로 선을 긋고 점을 찍는 것과 다름없이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단순한 물체에 지나지 않던 종이는 신비로운 표상의 세계로 승화된다. 그 속엔 순수하면서도 긴장되고 기묘한 미학이 담겨있다.
80년대 중반이후 권씨는 작품에 색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채색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개입이다. 찢고 뚫은 작업뒷면에 반투명한 청 회색을 칠함으로써 그것이 배어 나오는 효과로 이전보다 훨씬 회화성이 두드러졌다.
『90년엔 제 작품세계에 어떤 변화가 올지 저자신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새로운 시작임엔 틀림없겠지요.』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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