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에가 재판 미국도 ″골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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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비록 「포악한 독재자」일지라도 타국의 지도자를 체포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병, 총부리의 위협 속에 미 법정에 세운 미 부시행정부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냐는 시비가 노리에 가에 대한 재판시작과 함께 표면화하고 있다.
지난 연말 노리에가의 축출 및 체포를 위한 미국의 파나마침공에 대한 내정간섭논란은 일단 제쳐놓아도 미국의 노리에가 체포 자체 및 과정, 그리고 재판회부 등이 허다한 법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노리에가 측 변호인들은 미국의 체포행위 자체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리에가는 일국의 국가지도자였으며 정치범이기 때문에 미국의 체포는 부당하며 미 법정에 회부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콜롬비아 등으로부터 미국으로 밀매되는 마약거래에 간여함으로써 미국 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그를 기소, 법정에 세운 것이다.
미국 법을 위반한 혐의로 미 법정에선 외국지도자는 노리에가가 처음은 아니다. 바하마군도의 남단에 위치한 터크스 카이코스도의 제1수석장관이 85년 마약거래혐의로 미국의 재판을 받은바 있다.
미국이 노리에가를 국내법절차에 따라 기소조치를 취하는 것은 시비의 여지가 없지만 적법한 재판이 되려면 파나마 정부당국에 의한 범인 체포 및 인도절차가 있었어야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엄격히 말해 그는 자신의「투항」이 있었다하지만 파나마 영토 내에서 미 당국에 의해 「체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법무부는 체포과정의 적법성을 주장하면서 그는 비록 파나마시티의 미 하워드 공군기지에 투항했지만 비행기가 이륙한 후 체포됐다고 설명한다. 이륙 후의 기내체포는 미 영토 내 체포이기 때문에 합법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따져 노리에가는 미국의 군대에 의해 구속되어 나중에 수송을 위해 미 마약단속 관계당국자에게 인계됨으로써 법적조치 상례를 벗어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밖에도 영장 없는 체포가 미 헌법 수정조항4조에 보장된 인권존중을 침해했고 미국으로의 소환은 파나마운하조약 및 제네바협정의 명백한 위반이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노리에가 변호인 측은 미국군대가 파나마를 침공하여 불법적인 방법으로 압류한 관계자료 및 기록도 적법성이 없으므로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하는 한편 부시대통령으로부터 미 언론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노리에가 비판분위기 등으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리에가 재판을 둘러싼 법적 딜레마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본격적인 재판과정에 들어가면 미 측은 더 큰 논란에 휘말릴 전망이다. 미CIA(중앙정보국) 의 쿠바·니카라과등 대중남미정보공작의 협조자로서 한때 미국의 재정적·정치적 보상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노리에가 측은 재판저지·지연작전의 수단으로 미 정보기밀자료 공개위협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란 콘트라사건으로 기소된 백악관참모 노스 해병중령과 포인덱스터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자신들의 행동이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 이를 증명할 기밀문서의 법정공개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상당부분의 혐의가 취하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리에가 측도 비슷한 작전을 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부시행정부는 만약 이 같은 작전에 말려들 경우 정보기밀자료의 공개를 방지하기 위해 노리에가에게 씌워진 혐의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기각하거나, 국가안보이익을 저해하고 부시를 포함한 고위정보관계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재판을 계속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설 지도 모른다고 일부에서는 우려하고 있다.
이 같은 법률적 측면을 고려하면 당장의 부시행정부 측 승리는 잠정적인 것이라고까지 과소 평가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이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파나마 침공으로 짊어지게 될 대외관계의 손실이다.
지난 1백50년간 20여회, 20세기 중에만도 11회나 중남미침공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미국은 드디어 군사력을 동원해 외국국가지도자를 일반범죄자로 체포하는 신기록까지 세움으로써 주변국의 눈에「포함외교」「무력외교」를 서슴지 않는 이웃으로 비쳐지는 대가를 치르게 됐다. 【워싱턴=한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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