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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심쩍은 박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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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6월 5일 세상을 떠난 '야구 대기자' 이종남씨는 클래식 음악광이었다. 감자탕과 무교동 낙지, 그리고 소주를 좋아한 그가 음악 이야기에 열중할 때는 피부가 햇빛에 그을린 스포츠 기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1989년 가을 어느 날, 이종남씨가 전날 밤 다녀온 연주회에 대해 말하다 이렇게 물었다.

"박수가 헤프면 안 돼. 정말로 연주자를 죽이는 박수가 어떤 박순지 알아?"

그러면서 이종남씨는 소리가 날듯 말듯 두 손을 약하게 맞부딪치는 박수를 쳐 보였다. 표정이 묘했다. '뭔가 미심쩍다'는 듯한, 아니면 '내가 박수는 쳐 준다만…'하는 그런 표정. 그 박수를 받는 사람은 마음이 꽤 불편할 것 같았다. 이종남씨가 쳐 보인 그런 박수를, 딱 한번 실제로 들어봤다. 2002년 9월 독일에서였다.

쾰른 가까운 곳에 '부어샤이트-디라트'라는 곳이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의 숙소였던 벤스베르크성이 멀지 않다. 여기에 '쿨투어쇼이네(Kulturscheune)'라는, '문화창고'라고 번역할 만한 건물이 있다. 원래는 방앗간이었다고 한다. 나무를 많이 사용한 실내는 다소 좁지만 울림이 풍부해 실내악이나 독주, 시 낭송에 적합하다.

그날은 21일로서 셋째 주 토요일이었다. 쇼팽의 소나타와 스케르초, 젊은 작곡가들의 콩쿠르 입상 작품 등 피아노 음악이 주로 연주됐다. 1부 첫 무대에 등장한 피아노 연주자는 불행히도 스케르초 B플랫 단조의 한 소절을 완전히 빠뜨리고 말았다. 1층과 다락에 끼어 앉은 100여 명의 청중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났을 때 이종남씨의 그 박수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서 어떤 종류의 연주회를 가든 박수는 후하다. 연주자의 실수에 눈 감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덮어 놓고 앙코르까지 요구한다. 이튿날 신문의 연주회 평을 읽으면 연주자의 실수를 '독특한 해석' 정도로 돌려 표현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게 배려의 한 양식이라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다만 퍼부어 대는 박수 속에 허위와 오류에 대한 외면이 숨어 있다면 문제다.

박수가 찬사의 한 형태라면 무조건 퍼부어 대는 박수는 찬사의 과잉이다. 그리고 전문 분야에서라면 진실의 왜곡이거나 사실과의 단절일 수도 있다. 매스컴은 보도와 평론을 통해 박수를 치거나 야유한다. 문화.스포츠의 분야에서는 야유보다 박수가 많다. 거기 종사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배려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난주 끝난 월드 바스켓볼 챌린지(WBC)를 통해 세대교체 뒤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남자농구대표팀에 대한 기사들을 다시 읽는다. 그 가능성에 대한 찬사는 눈이 부실 정도다. 몇몇 선수에 대해서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표현된다. 나이 어린 유망주에게 박수는 최선의 격려겠지만 미완(未完)이라는 이름의 현재를 외면하는 면이 있다. 현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가능성은 위험하다.

'미심쩍은 박수'의 결핍은 우리 사회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약간만 미심쩍어 해도 그 표현을 배반이나 불신 또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더 강하게 응징하려 드는 문화 말이다. 몇 마디만 토를 달아도 "막 나가자는거냐"며 전투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문화가 미심쩍어하는 박수를 멸종시켰는지 모른다.

4년 전의 '방앗간 연주회'에서 스케르초의 한 소절을 잊어버린 연주자의 표정이 어땠는지 보지 못했다. 다만 그 난감한 박수 소리를 들었다. 피아노 연주자는 방앗간에서 기죽지 않았다. 그는 연주회가 끝난 뒤 청중과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물론 거기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보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