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 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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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사진 찍는 걸 좋아할 뿐인데, 이젠 커피전문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사진 찍으면 '된장녀'로 오해받을까봐 걱정되네요."

회사원 이모(27.여)씨는 요즘 인터넷을 달구는 '된장녀' 때문에 색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의 내용과 유사한 행동을 할 경우 자칫 허영기 많고 속이 빈 된장녀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된장녀 문제가 오프라인으로 확대되고 있다. 허영에 물든 사회의 단면을 꼬집었다는 주장과 근거 없이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왜곡된 인터넷 문화라는 반박으로 이어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패밀리 레스토랑 가면 된장녀?"='자기 치장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명품 가방으로 치장하고, 테이크아웃 커피점과 패밀리 레스토랑을 즐겨 찾으며 뉴요커(뉴욕사람)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20대 여성'이 인터넷에 비춰진 이른바 된장녀의 모습이다.

된장녀는 지난해부터 일부 인터넷 카페에서 20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돼 오다 지난달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이 확산되면서 '허영에 찬 여성들'이란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어 한 아마추어 만화가가 인터넷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단편만화를 게재하고, '된장녀 키우기'라는 플래시 게임까지 나오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온라인에만 떠돌던 된장녀는 최근 여성 연예인들을 통해 오프라인으로 진출했다. TV 오락프로에 출연한 한 여배우의 말이 발단이 됐다. "(처음 만난 남자가)할인카드를 사용하면 분위기를 깬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에 네티즌들이 일제히 '된장녀'로 지칭하며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후 일부 연예인의 소비행태를 비꼬며 된장녀로 폄하하는 사례가 늘었다.

최근 일어난 '가짜 명품시계' 사건이 보도되자 "가짜 명품을 산 연예인은 된장녀다"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네티즌 '배짱으로'는 "된장녀 논란은 허영심 때문에 안 내도 될 돈을 내고 소비하는 여성들의 삐뚤어진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일반인도 '된장녀 공포'=최근엔 평범한 여성도 된장녀로 몰릴 수 있다는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커지고 있다.

회사원 고모(26.여)씨는 "나도 된장녀의 하루에 나오는 B원피스, L가방, I MP3 플레이어를 쓰고 있다"며 "남들이 된장녀라고 부를까봐 겁이 난다"고 하소연했다.

이는 중산층 여성의 생활습관이나 소비행태를 빗대 된장녀로 매도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중산층이 찾는 특정 제품과 상표를 마치 사치품처럼 부각시킴으로써 소비문화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숭실대 배영(정보사회학) 교수는 "취업 등으로 불만에 쌓인 젊은이들, 특히 남성들이 이를 표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해 된장녀와 같은 대상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자칫 우리 사회에 만연된 편 가르기 현상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애란.권호 기자

된장녀서 파생된 말들

허영심 가득한 미혼여성을 일컫는 '된장녀'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면서 '고추장남'을 비롯해 '머슴남' '된장아줌마' 등 아류 용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용어는 '~의 하루'라는 내용의 글로 인터넷에서 유포되고 있다.

고추장남은 된장녀와는 정반대 개념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능력이 없고 자기관리를 못하는 남성을 말한다. 잘 씻지 않고 유행 지난 가방을 갖고 다니며, 돈이 아까워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주위에 친구도 없어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글 올리기로 시간을 보낸다.

머슴남은 된장녀인 여자친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마치 '머슴'처럼 행동하는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술에 절어 일어났음에도 오늘은 여자친구를 만나는 날이라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머슴남의 하루'라는 글은 모든 생활이 여자친구 중심인 남성을 표현하고 있다. '(술이 안 깨) 토끼같이 빨간 눈을 본 여친(여자친구)이 뭐라 할까 걱정' '음식이 나오자마자 디카로 사진을 찍어 여친을 기쁘게 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는 처음이라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등 그의 하루는 여자친구의 비위 맞추기에 집중돼 있다.

된장아줌마는 결혼한 여성이 주요 타깃이다. 가정은 등한시한 채 주름을 펴 주는 보톡스 주사를 맞아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고, 옆 동네 임대아파트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하며, 자신보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주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 '위기의 주부들'등에 등장하는 30대 중반 이상 여성의 삶을 빗대 한국 주부들을 폄하하는 내용이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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