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아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따지고 보면 총리는 5년4개월의 재임기간 중 매년 야스쿠니를 참배하면서 찜찜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비난이 있어도 '8.15' 야스쿠니 참배를 하겠다"는 공약을 한 번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죠. 총리는 물러나기 직전 그걸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제 야스쿠니 참배 현장에서 지켜본 총리의 표정은 뭔가 달랐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약속을 지켰다"는 뿌듯함 때문인가요.

하지만 총리, 왠지 씁쓸합니다. 허탈합니다. 그리고 화가 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총리에게 그 공약을 지키라고 한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총리 스스로 자승자박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총리, 취임 전 "신규 국채발행을 30조 엔 이하로 억제하겠다"던 또 하나의 공약을 기억합니까. 총리는 그걸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공약 때문에 종전일에 야스쿠니에 갔다는 억지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덧붙일까요. 취임 첫해인 2001년 종전일에 참배하지 않은 이유를 담화로 발표했습니다. "종전일 참배로 인해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일본의 기본적 입장에 의심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면 그건 결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 다음해 4월 참배 때도 비슷한 말을 했지요. 그럼 이번 종전일의 참배는 뭡니까. 의심을 사도 좋다는 말입니까.

둘째, 총리는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비난하면서 "'마음'의 문제인데 왜 그러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마음도 마음 나름입니다.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마음은 치기(稚氣)나 오기(傲氣)에 가깝지요. 1985년 총리로는 최초로 야스쿠니를 공식 참배했지만 이듬해 이를 그만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가 얼마 전 총리를 빗대 한 이야기를 들었지요. "'나의 마음'은 세계에 통용하지 않는다." 맞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대부분의 사람이 '저 사람은 기독교를 믿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돼 있습니다. 그걸 탓하지 마십시오.

셋째, 야스쿠니에 가면서 "주권국가의 합리적 권리" 운운하지는 마세요. 그건 미사일을 쏜 북한이나 하는 소리입니다. 세계 경제 2위인 대국의 지도자가 할 말이 아닙니다. 국력에 걸맞은 말, 그리고 외교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3년 11월 관저에서 총리를 만났을 때 총리는 여론의 비판에 "하나도 참고, 둘도 참고, 셋도 참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참기만 했지 변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과 중국 국민의 생각 또한 변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 '고이즈미 극장'은 막이 내립니다. 곧 떠날 사람을 두고 요란스럽게 문제삼아 봐야 한국.일본 모두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총리는 다음 총리, 그리고 이웃나라에 '더 이상 사이가 나빠질 순 없다'는 의도치 않았던 선물을 남기고 물러나는지도 모릅니다. 총리, 한 달 뒤 '전직 총리'가 되면 마음껏 야스쿠니에 가서 참배하십시오. 그때는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총리는 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은 지도자가 아니라,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간 인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을지 모른다는 걸 말입니다. 8월 15일. 한여름 도쿄의 날씨처럼 더욱 무덥게 느껴진 하루였습니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