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땅에 떨어진 교사 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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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K고의 3학년 담임 윤모 교사(48)는 얼마 전 대입원서 작성과정에서 담임반 학생의 학부모로부터 들은 얘기가 계속 귓전을 맴돌아 씁쓸한 기분이다.
윤교사 반의 박모군(17)은 우등생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희망하는 S대 정치학과를 갈 실력은 되지 못했다.
윤교사는 한 명이라도 더 합격시키겠다는 욕심에서, 그리고 제자에게 낙방의 쓰라림을 안겨주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지망대학을 Y대나 K대로 낮추도록 종용했다.
본인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자세였으나 학부모는 시종 막무가내였다. 결국 박군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고 윤교사와 승강이가 벌어졌다.
윤교사가 『갈수록 대학 들어가기가 힘드니 안전지원을 하자』고 설득하다가 『죽어도 S대를 가야겠다면 사대로 낮춰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한 것이 화근.
박군의 어머니는 대뜸 『아니, 우리 애가 선생이나 할 애 같이 보여요』하고 톡 쏘더니 『나도 이 애 위로 둘이나 대학에 넣어봐서 선생님 아는 것만큼은 알아요.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시고 시키는 대로 해주세요』라고 다그쳤다.
윤교사는 할 수 없이 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었으나 교사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박군 어머니의 거친 말이 삭여지지 않는다.
서울 Y중의 최모 교사(32)는 최근 한 학생을 때린 것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른 뒤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혀있다.
평소 막돼먹은 언행을 일삼아 교사들 사이에 문제학생으로, 급우들 사이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온 김모군(15)이 수업시간 중 음란서적을 보는 것을 적발, 꾸짖자 오히려 대드는 바람에 뺨을 두 대 때린 것이 발단이었다.
김군은 『××, 더러워서…』라는 욕을 중얼거리며 바로 책가방을 꾸려 교실을 나간 뒤 감감무소식이었고 이틀 뒤 김군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교장을 만났다.
『애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학칙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이지 때리긴 왜 때립니까. 애가 입안이 터져 밥도 못 먹어요. 그 깡패선생 어디 있습니까….』
교장은 최교사를 불러 『사정이야 어쨌든 시끄러워지면 당신이나 나나 좋을 건 없지 않느냐』며 『사과하라』고 했다. 이렇듯 사건은 「교권을 팽개친 사과」로 무마됐으나 최교사는 이후 소신 있는 학생지도에 의욕을 잃었다.
이 같은 사례들은 적지 않아 교사의 권위가 어느 정도로 실추돼있는가를 쉽게 짐작토록 해준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고전 속의 구절일 뿐이다.
『이제 웬만한 학부모치고 교사들처럼 대졸자 아닌 사람이 없고 교사들보다 못한 사회적 대우를 받는 사람도 드뭅니다. 학부모들 눈에 교사가 우습게 보이기 시작한 거죠. 게다가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것이 현 세태 아닙니까. 교사 권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의 변화상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요.』 서울T고의 윤리주임 강모 교사(39)의 진단은 체념에 가깝다.
비뚤어져 가는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취지로 출발한 전교조 운동도 교사들의 권위실추에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큰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붉은 띠를 매고 팔을 치켜드는 농성교사, 교장이 교사를 고발하고 경찰과 한편이 되어 이들을 끌고 가는 다른 교사,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유인물의 홍수….
이러한 비교육적인 광경들이 학생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는가는 전교조 사태 때 여실히 드러났다.
학생들이 교사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기에 교장을 교문 밖으로 들어 내팽개치고, 관사에 돌을 던지고, 특정 교사의 수업을 거부했을까하는 점이다.
『교사들의 권위 실추에는 교사 자신들의 책임도 큽니다. 특히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교직에 대한 사명감이 결여돼있고 학생들과 쉽게 타협, 심지어 형이나 친구처럼 지내려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요.』
서울시교위의 최모 장학사(52)는 교사의 권위는 스스로 지키려 할 때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에서도 선생이라고 하면 누가 알아나 줍니까. 교사들이 뭐로 긍지와 자부심을 갖습니까. 유능하고 패기 있는 젊은이들이 교직에 매력을 느끼겠습니까.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없는 한 교사들의 패배감과 무력감은 씻어지지 않습니다.』
서울H고의 정모 교사(54)는 교권 실추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는가를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일부 사학에서 빚어지고 있는 각종 교권 침해 사례를 보면 교사의 권위 운운하는 것이 오히려 사치스럽다는 느낌이다.
이사장이 베푸는 술자리에 참석치 않았다 해서, 재단의 비리를 지적했다해서, 오래 근무해 호봉이 높아졌다해서, 교단에서 내몰릴 만큼 교사의 신분이 불안한 이상 교사의 권위가 발붙일 여지는 없는 셈이다.
『80년부터 88년까지 교권 침해 사례는 신분 피해 2백55건, 폭행 피해 29건, 명예훼손 피해 35건 등 4백건이 넘어요. 수치심 등으로 인해 접수되지 않는 사례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한국교총 한 관계자는 『교사들의 권위가 지켜지지 않는 한 정상적인 교육은 기대할 수 없다』고 들며 『교육현장의 안팎에서 다같이 권위회복을 위한 일대 캠페인이라도 벌여 나가야 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김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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