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이념보다 빵"…경제개혁 염원|공산통치의 파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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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0년 가까이 동구시민들은 두개의 얼굴, 두개의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40년 가까이 전체주의적 체제에 짓눌려 체질적으로 순응돼 있었으나 비공식적인 모임이나 개인적인 접촉에서는 체제 비판적인 언행이 번득이곤 했다.
체코의 공산당 체제를 전복시키는 도화선이 된 17일의 시위를 사흘 앞두고 취재진은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날로 취재진은 체코 정부당국이 마련해준 스케줄대로 국영 영화배급 회사를 찾았다.
역시 정부관계 기관에서 알선해 준 통역의 안내로 영화예술부문에서의 공산당의 역할, 영화의 사회주의체제 내에서의 기능 등에 관해 몇몇 관계자와 집중적인 문답이 오갔다.
취재가 끝난 후 호텔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함께 걷던 통역자가 불쑥 『공산주의가 이 나라를 망쳐놓고 있다』고 한마디 내뱉었다. 체코와 같은 체제에서 외국기자와의 접촉에 활동하는 인물이면 대개가 체제에 동조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있던 취재진에게는 의외의 말이었다.
50대 초반의 이 여인은 초면의 외국기자들에게 이 말 한마디로 자기가 희망하는 취재방향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새 정부 원한다">
다음날 프라하에서 1백여㎞ 떨어진 집단농장을 취재하고 돌아오던 길에 쿠트나 호라라는 중세의 조그만 도시를 지날 때였다. 시내 중심가를 지나며 붉은 깃발과 함께 구호가 적힌 대형간판을 보고 통역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체코공산당 만세. 당의 지도로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를 완성하자』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온종일 함께 다니면서도 별말이 없던 택시운전사가 불쑥 『맨 마지막에 아멘이란 말이 빠졌다』고 끼어 들어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17일 오후4시 프라하 시 알베트토가 카를로바 대학 앞 네거리. 지난 1939년 나치군의 체코침공에 항의하다 게슈타포에 의해 피살된 체코학생운동의 영웅 얀 오플레탈 군의 50주기 기념행사를 처음에는 침울하고도 엄숙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집회에 참가한 1만 여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갑자기 절규에 가까운 구호가 터져나왔다.
『누구 때문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영하의 날씨에 이미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 어둑어둑한 대학가는 갑작스런 정치적 구호로 분위기가 함성과 함께 활기를 띠고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구」란 누구를 지칭하는가.』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던 이 카를로바 대 경제학과 학생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공산당이다.』
지난 20일의 30만 프라하 시위대는 또 다른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새 정부를 원한다』 프라하 시 중심부 바출라브가의 이날 시위에 참가한 온화한 모습의 60대 노신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공산당이 집권하는 정부를 원하지 않는다.』
프라하 공과대학의 한 학생은 더듬거리는 말로 얘기했다. 『우리는 지금보다는 잘 살아야한다. 더 잘 살려면 현재의 경제를 개혁해야하고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40년 일당 독재를 해온 공산정부를 물리치고 정치개혁을 먼저 해야한다. 그래서 나도 오늘밤 여기 브르타바(몰다우)강 카를로바(찰스) 다리 위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루고 있는 슬로베니아 공화국의 수도 류블랴나.
한 40대 초반의 지식인도 사뭇 냉소적이었다.
공개석상에선 사회주의국가의 관광 업에 대해 의젓하게 설명해주던 그는 입을 작게 열어 빠르게 말하는 영어발음으로 『유고에서는 아무나 공산당만 비판하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오는 날씨에도 검은색 선글라스를 즐겨 끼는 키 1백80㎝ 가량의 이 유고지식인은 공산당을 비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말씨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불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당수 지프코프가 축출되던 날 저녁공산당원이라는 트럭운전사의 가정을 방문했다.
『만족할만한 생활을 하고있다』는 이들 가족에게 체제에 관한 질문을 하자 우선 통역이 괴로워하며 땀을 뻘뻘 흘린다. 정치문제 거론은 이들에게 워낙 금기시 돼왔던 탓일까 여러 사람 앞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옆에 다른 사람이 없을 경우는 딴판이었다.
『우리는 우리 체제가 최고라고 교육해왔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경제가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소피아대학 교수의 말이다. 경제개방추세에 따라 외국인과의 거래를 위한 자문회사에도 참여하고 있는 그는 불가리아 경제의 공동상태원인을 정치체제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한 무역담당자는 한 리셉션에서 불가리아의 개혁을 이렇게 설명했다. 『40년간의 공산주의 통치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학생들 열띤 토론>
공산당의 몰락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걸리지만 꼭 그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주변의 눈치를 몹시 살피며 정치적 문제에 언급을 매우 꺼려하던 이 40대 신사는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공산주의 대신 무언가 잘 모르지만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바쁜 구실을 대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미 개혁에 한발 앞서있는 헝가리나 폴란드의 경우는 차이가 있었다.
시민들은 누구나 거리낌없이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시장경제지향의 구체적인 개혁방안도 나름대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체코에서 시위가 있기 한달 전에 둘러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는 소련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대형의 붉은 별들이 건물꼭대기에서 기중기에 의해 내려지고 있었으며 10월23일 헝가리 의회는 국호를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인민을 삭제한다고 선언했다.

<지도자의 딜레마>
헝가리가 「헝가리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던 날 다뉴브강변 시내 중심가에 모인 수십만명의 인민들은「인민」이 빠진 새 국호에 열렬히 환호했다.
의사당의 주 돔 꼭대기에 높이 솟아있는 6t짜리 대형 붉은 별도 조만간 제거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공산당도 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말 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개혁에 열정적이고 서구식 사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형식논리를 갖춘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모두가 공산주의자였다는 데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당 체제나 모든 조직은 사람들은 그대로 온존한 채「공산당」이란 이름을 「사회당」으로 바꾼 단계에 아직까지 머물러 있는 상태다.
이에 비하면 폴란드는 한 걸음 앞서 있는 느낌이다. 바웬사, 마조비에츠키 수상과 함께 자유노조 지도자 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집권당 원내총무인 게레메크 교수는 『모든 중부유럽의「동쪽국가」들이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헝가리의 경우 폴란드와 나란히 개혁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그러나 문제는 명칭을 바꾸는데만 있지 않다. 우리는 명칭 바꾸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는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것은 현실이다』고 헝가리에 비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포기는 불가피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바르샤바 대학의 법학 교수인 질린스키 박사도 『폴란드는 원래 사회적으로 다원주의가 풍부한 나라다. 레넌수의나 마르크시즘은 모두 폴란드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폴란드에 지배적인 이념이란 것은 존재해 오지 않았다』고 말하며 새로운 폴란드 고유의 모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있다.
바르샤바대 학생회의 한 간부학생도 학생운동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러 갈래의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단체임을 강조하며 한가지 이념만을 추구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중 한 학생의 소박한 꿈은 『이제 정치는 개혁이 시작됐으니 경제 개혁을 빨리 시작, 지금의 파멸에 가까운 국가경제를 회복시킬 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종주국인 소련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인민이 주역 돼야>
공산국가의 메카인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3천3백만 소련 젊은이를 회원으로 갖고 있는 소련공산당 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가 있다.
대국 소련에 어울리지 않게 칙칙한 분위기의 모스크바 뒷골목, 보그단 호멜니츠기 가의 콤소몰 본부사무실.
소련 콤소몰의 국제담당부 책임자 판체힌은 『소련에서는 교주적 공산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문을 열었다.
형형한 눈빛에 달변인 판체힌은 『이제 당이 지배하는 체제는 그만두고 인민이 지배하는 체제를 수립해야한다. 우리에게는 지금껏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작업이 단순하지 않다. 고통이 많이 수반될 것이다』고 말을 이어갔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한 젊은 기자는 『소련 경제는 체제부터 개선해야한다. 경제개혁을 위해 우리 최고 소비에트(의회)가 지금 열심히 정치개혁을 토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 가에는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다. 개혁의 주체가 체제 안에 그대로 온존해 있는 동구의 공산주의는 지난 수십년간 굳혀온 자체의 견고성으로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동구에서는 현재까지의 공산주의 체제가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지금까지의 공산주의는 「인민」을 잃고있으며 「인민」은 그러한 공산주의 체제를 버리고 싶어하고 또 벗어나고 싶어하고 있었다. <글 김동수 부국장 진창욱 차장 사진 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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